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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약 한달에 걸쳐 읽은 은희경의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


예전부터 단편소설 모음집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았지만 역시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 어떤 단편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난 장기기억력이 좋지 않다. 
그런 내가, 읽는 데 약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닥친 특별한 사건,
그들의 성격, 혹은 그들 사이의 갈등, 뭐 이러한 자질구레한 것들을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갈등이래봤자, 1시간 안에 끝나야 할 갈등이 뭐 얼마나 기억에 남겠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은희경의 [타인에게 말걸기]를 굳이 구입한 이유는, 
그녀의 장편소설 [새의 선물]에 홀딱,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용하는 모든 수사, 표현력, 묘사력, 조그마한 행동을 설명해내는 그 능력이 놀랍고 신기하고 부럽고.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닮고 싶었다.
나도 그렇게,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묘사력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은희경의 책 이라면 뭐든.
하는 마음으로 아무 고민없이 "은희경씨 책 있는 거 전부 골라주세요" 라고 점원에게 말했던 것이다. 

종로에 널린 그런 대형서점이 아니었던 게 어쩜 다행이다.
동네 작은 서점의 점원 언니가 골라준 책은 단 두권, 이 단편집과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였다. 
그리고 좀더 빨리 읽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먼저 읽기를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단편집.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단편소설은 몰입을 할라치면 다시 다른 이름의, 다른 사연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읽는 데 가속도가 좀처럼 붙지 않았다. 

결국 8월 2일에 집어 든 이 책을, 8월 28일에서야 겨우 책장 한 켠에 꽂아둘 수 있었다.








총 아홉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노란색 색연필로 밑줄을 그어둔 몇 개의 문장, 혹은 대화를 옮겨 적어보았다. 


"거기 가서 청첩장 돌리면 다들 날 나쁜 년이라 욕하겠지? 하면서 친구는 입술을 비틀고 웃었다. 그러라지 뭐. 난 욕먹는 게 좋아. 욕을 먹기 시작하면 못할 일이 없거든. 그런 게 자유 아냐? 그러면서도 친구는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그녀의 세번째 남자 中)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일 터인데 나로서는 내게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따른다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타인에게 말 걸기 中)

"그때 산부인과에 따라가달라고 처음 찾아갔을 때, 왜 하필 너였는 줄 알아?"
"왜 그랬는데."
"네가 친절한 사람 같지 않아서야."
"......"
"거절당해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어. 그리고 만약 병원에 따라가준다 해도 너한테라면 신세진 느낌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 남의 비밀을 안 뒤에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정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게 보였기 때문이야."
"......"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 너하고든 뭐가 잘못되더라도 어쩐지 내 잘못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타인에게 말 걸기 中)

못 견딘다는 건 싫어, 선희가 말했다. 갖고 싶어 못 견디겠다, 먹고 싶어 못 견디겠다, 그리고 보고 싶어 못 견디겠다 따위. …  난 담배도 끊었어. 아니 끊은 게 아니라 상관없게 되었어. 있으면 피우고 없으면 안 피우니까. 생각해 봐. 밤중에 담배가 떨어졌는데 자판기를 세 개나 찾아 헤맸지만 다 고장이었어. 그 미칠 것 같은 심정은 정말 당해보지 않고는 모를 거야. 그래서 그날부터 안 피워버렸지. '못 견디겠다'는 느낌은 정말 싫으니까. 
 (먼지 속의 나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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