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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시

김소연, 사랑과 희망의 거리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 지성사)


사랑과 희망의 거리




우리는

서로가 기억하던 그 사람인 척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빗방울에 얼굴을 내미는

식물이 되고 싶었다고 말할 뻔했을 때


너, 

살면서 나는…… 살면서 나는

그런 말 좀 하지 마

죽었으면서


귀가 아프네

나는 얼굴을 바꾼다 너무 많은 얼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가면이 열리는 나무였다면

가지 끝이 축 처졌을 것이다

아니, 부러졌을 것이다


사실은

이해를 하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깨로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

다가갔다 물러섰다,

빗방울이 앉았다 넓어졌다 짙어지는

우리의 어깨가

얼룩이 질 때


유리창 같다, 니 어깨는

고막이 있니, 니 어깨는


필요한 말인지

불필요한 말인지

알 길이 없는 이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빗방울의 차이에 대해 말할 줄 아는 사람과 마주앉아 있다

빗방울이 되어 하수구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