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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체인지킹의 후예] 이영훈, 문학동네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최근에 정유정 작가의 남편 분이 소방관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인가 그녀의 장편소설 28에는 소방관이 꽤나 비중이 큰 인물로 나온다.

소설가의 삶은 소설 속에 묻어난다.

이영훈 작가의 체인지킹의 후예 역시 마찬가지였다.


400페이지가 넘는 꽤나 두꺼운 소설을 읽기에 앞서, 숨을 고를겸 뒷장의 작가 인터뷰와 수상 소감부터 읽었다.

그리고나서 소설을 읽어내려가니 작가의 어릴 적 삶은 소설 속 샘에게,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놓인 모두에게 녹아있었다.

맞다. 그러고보니 주인공 이름부터가 작가의 이름과 같다.



체인지킹의 후예

저자
이영훈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12-2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국문학을 이끌어가는 힘!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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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영훈. 채연. 샘. 안. 민. 윤필.



1.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혹은 "자신 있습니다" 류의 뱃심 빡 들어간 다짐이 귀에 익은, 혹은 눈에 익은 이 시대에

소설 속 영훈의, 꼬리뼈에 힘이 탁 풀린 듯한 매가리없는 말투가, 어색하다 못해 처음에는 거슬리기까지 했다.


-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자신 있어? / 자신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해야 할 일입니다. 368


그런데 읽다보니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힘내 라는 말보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더 위로가 되듯이

자신 있다는 말보다 자신은 없지만 해보겠다는 말이 어쩐지 더 진솔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자신있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되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해야 하는 일이니까 묵묵히 하는 것.


아 우리가 항상 너무 힘을 주고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자신감 넘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정말 좋은 미덕이지만 가끔은 힘을 빼고 지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2. 

김영하 소설가의 심사평 "어울릴 법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엮어 독특한 소설적 분위기를 직조하는…"

정말 그렇다. 소설 중반부까지도, 대체 이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의 연관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싶었는데 다 읽고나니 보인다.

주인공 영훈. 채연. 샘. 안. 민. 윤필 등은 전부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은 자식들이거나(자식이었거나) 자식과의 관계 맺기에 서투른 부모들이다.


영훈은 어렸을 적 정신병원에서 나온 어머니와의, 그리고 현재는 샘과의.

아, 채연은 제외하고.

샘은 뮤지션 아버지와의, 그리고 계부 영훈과의.

안은 자살한 아들과의, 남은 딸과의.

민은 (살짝 까먹었지만 아마도) 아버지와의.

윤필은 보험비를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 아버지와의.


이 이야기들이 각자의 소리를 내며 얼기설기 이어지다가 소설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즉 영훈이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자신의 어렸을 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샘과의 관계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할

이 소설은 변신한다. 빛을 내며.


7년 간 집 밖을 나서지 않았던 "민"이 집밖으로 한 걸음 내딛었고

단 한 마디 대꾸하지 않던 "샘"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으며

영호에게 따님을 대하는 괜찮은 방법을 전수 받은 "안"은 딸과의 관계가 좋아질 것으로 보인다.

"윤필"은? 웃는 아이의 얼굴과 윤필에게 팔짱을 낀 아내의 모습으로. 대신하자.


그리고 채연은.

유일하게 빛을 잃었으나.

빛을 주고 떠났으니 



3.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빌려온 

파워레인저와 같은 특수촬영물에 관한.

혹은 보험 및 보험 사기에 관한 이야기는 책장 넘기는 속도를 가볍게 짓눌렀으나

이해 안되는 것은 과감하게 넘기고

너무 자세해서 재미없다고 느껴질 땐 슬쩍 건너뛰어 읽으면서

페이스를 조절했더니

나름 두꺼운 분량의 장편소설 4일 만에 완주!



4.

그나저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별처럼 많은 사랑 중에

사랑해라고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한 사랑이 있을 수 있. 구나. 그런 거구나.

안타깝네.




▼ 내게 남은 문장들 ---------------------------------------------------------------------------------------------------------------


그렇게 대답해볼까?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그래서 그녀와 함께 있어야 했다고.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쳤다. 이해받을 수 없는, 아니, 이해받을 필요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252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얼 얻고 잃었나. 영호는 헤아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따질 수 없었다. 세상에는 결코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411


  최선이라고, 말할 순 없다. 최선 같은 것은 모른다. 하지만 꾸준히 쓰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하진 않았다. 무척 즐거웠지만, 때때로 겁을 먹었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 쉬지 않고 썼다. 이 계절의 내 자랑거리는 그런 것이다. 뛰거나, 걷거나, 기어, 한 방향으로 왔다는 것. 그러니 책을 손에 든 사람들에게도, 이 계절이 의미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계절을 생각하고 있다. 느리거나, 빠르거나, 높거나, 낮거나, 이런 것은 이제 상관없다. 속도나 고도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다. 무슨 일이 닥칠지는 알 수 없지만, 주어진 계절을 지나가려 한다. 멈추지 않고, 후회 없이.

  아마도 이런 계절들이 모여, 어떤 시절을 이룰 것이라고 믿는다. 438 작가의 수상소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