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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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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려고 하기 직전, 갑자기 생각했다.

'금요일 밤이고, 금요일 이 시간에 얌전히 집에 도착했고, 마침 엄마아빠는 외출하셨으니 엄마방 TV는 오랜만에 내 차지가 될 수 있겠구나.'


텔레비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우리 아빠 덕분에 거실과 각 방에 TV가 한 대 씩 놓여 있는데,

이사오면서 내 방 TV는 장식품이 되었고, 화면에 빛 한 번 밝히지 못한 채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 상태이므로

나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프로그램을 본 지가 올해 3월 22일 이후로는 없었던 것이다.


리뷰는, 책을 읽은 직후에 써야 하는건데. 바보상자를 보고 난 뒤엔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다 까먹을텐데.

라고 인식은 하면서도 TV,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티스토리에 빈 페이지를 고대로 열어놓고. 

엄마방에 가서 푹신한 침대에 누워 TV 전원을 밝혔더니, (내 방엔 침대도 없으므로 엄마방은 가히 천국)

아아, 광고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꽃보다청춘이 하고 있었다.

요즘 지하철 플랫폼에 흔하게 널린 '바로그곡' 이미지로만 접하던 나의 유희열님을 영상으로 접하니.. 들뜬 마음으로 감상하고 있는데, 


마추픽추에 다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뭔가 모르게 몽글몽글 뜨거워졌고,

그 뜨거움이, 내 심장을 쏴라, 를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느꼈던 그 뜨거움과 결국엔 같은 것이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모니터 앞에 앉아, 한시간 째 깜빡 거리고 있는 커서 옆으로, 한 자씩 적어가는 중이다.


바보상자가 조금은 앗아갔을 테지만. go ahead.




내 심장을 쏴라

저자
정유정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09-05-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강렬한 흡인력을 갖춘, ...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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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두 남자. 24살의 류승민과 이수명(별명이 미스 리다), 더불어 최기훈, 점박이, 김용, 만식 씨, 한이, 지은이, 등.



소설 속으로 빠져들기가 꽤나 어려웠던 책이다. 정신병원은, 너무 모르는 세계였다.

아니, 예전에 몇 개월 정도 보호자로 생활해 본 경험밖에 없는 나로서는 병원이라는 곳 자체가 너무 낯선 곳이었다.


"도입부가 잘 읽히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발자크 소설처럼, 처음 60쪽가량의 지루함만 참아내면, 그리하여 소설적 상황과 등장인물들과 친해지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몰입하여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는 심사평을 미리 봤더라면 위안을 좀 삼았을 것을.. 심사위원들도 읽기 힘들었던 거라니.ㅋㅋ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이 질문에서 소설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가와는 상관 없이, 내가 느낀 것은,

내가 스스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내 몸뚱아리, 내 실체와는 상관 없이,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할 수 있을 때. 


예전의 나는, 취향도 없고, 선호하는 것도 없고, 이래도 그래, 저래도 그래, 

별명이 "구래구래"인 아빠를 닮아 나도 그래그래, 하는가보다 했다.

정치적인 의견도 없고, 주장과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하는 논술 쓰기를 제일 싫어하고. 나는 내가 회색분자라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결과물로서 나의 대학교 1학년은 '가치관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의견만이 의견은 아니었고. 정치적 의견이 없다고 가치관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알겠고, 내가 아는 한에서는 내 의견이 있고, 색깔이 있구나.

라는 걸, 정말 스물일곱에 와서야 알게 됐다.

그런 뒤에야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떳떳함이 생겼다. 나는, 그냥 나야.


"넌 누구냐?"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잘 놀고 있다가 별안간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돌아서서 문짝에 등을 기댔다.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존재의 징표'에 대해 물은 거라면, 내놓을 것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유령이었다. 240


출소 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볼펜 한자루와 초등학생용 노트 한 권을 샀다. 심판위원회의 현장 심사를 받을 목적으로 산 것이었다. ... 그날이 오면, 내게 세상으로 귀환할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준비를 해야 했다. 횡설수설하다가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도록. 밤마다 노트를 채워나갔다. 조금씩, 남 몰래 한 장씩, 어떤 밤엔 십수 장씩.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나를 위한 변론을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승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볼펜 한 다스가 사라졌다. 노트는 열 권으로 불어났다. 그 사이 나는 무한히 자유로웠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 인생의 표면을 떠돌던 유령에게 '나'라는 형상이 부여된 것이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334



내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던 난, 내가 갖고 있는 트라우마, 혹은 컴플렉스, 단점. 에 대해서도 역시 속시원히 털어놓기 힘들었던 아이였다. 이제는 그 트라우마조차도 나를 설명하는 한 부분이라는 것을. 조금은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미스 리 선생님은 왜 안 가?"

나? 어리둥절했다. 당황스러웠다. 이 남자는 왜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로선 그런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겐 도망쳐서 도달해야 할 만큼 절실한 세상이 없었다.

"나한테 공부도 가르쳐주고, 승민이 탈출하는 거 도와주다 번번이 궁지에 몰리면서, 자기한테는 왜 아무것도 안 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웃으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무안했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만 넓은 놈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나, 미스 리 선생님 좋아해. 정말로. 주제넘은 말이지만 선생님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짠하고. 그러면서도 참 이상스러웠어. 이런 사람이 이런 데서 왜 이러고 사나. 그래서 원주에 시험 치러 갈 때 최기훈 선생한테 물어봤어. 미스 리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도망치는 병이라고 그러대. 그땐 최 선생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저 무시한 놈 소견으로 그러고 말았지. 자꾸 병원에서 도망쳐서 아버지가 이 산골짝에 가둔 거구나. 내가 거꾸로 생각했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겠어."

우울한 세탁부의 다음 말은 통렬하게 가슴을 찔렀다.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291





나도 혼자 옷 벗을 줄 안다. 씻을 줄도 안다. 감추고 싶은 비밀도 있다. 이 인간은 '수치심'이라는 단어가 자기 사전에만 있는 줄 아나? 62



"최 선생님도 알고 있었잖아요."

문간에서 최기훈을 돌아봤다.

"난 점쟁이가 아냐. 가족도, 본인도 말하지 않는 걸 나 혼자 알 길은 없어."

"승민이가 여기 갇힌 이유도 알고 있잖아요."

"이수명. 난..."

최기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뭔가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난..."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최기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꽉 붙들었다.

"승민이가 어느 쪽인지, 최 선생님은 잘 알아요. 그게 내가 아는 진실이에요." 213



"문제를 알게 된 게 불과 반년 전이야. 갑작스럽게 안압이 올라갔어. 녹내장을 의심하고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RP가 발견됐고. 녹내장은 그놈이 싼 똥덩어리에 불과했어. 소속 클럽에 통보됐고 비행이 금지됐어. 막막하더라. 볼 수 없게 된다는 데 대한 두려움보다 다시는 날 수 없다는 데 대한 분노가 더 컸어. 너라면 어떻겠냐? 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날아다녔던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비행 금지구역으로 변해 있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날개 꺾인 독수리의 절망은 오리의 이해 영역 밖이었다. 284



"이수명 씨는 류승민 씨의 죽음을 인정하나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승민은 내게 죽음이나 삶으로 분류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승민 자체로 존재했다.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 기억이나 실체 같은 개념이 가닿지 않는 어떤 차원이기도 했다. 나는 거기에 맞는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331



172-176



26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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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갑자기 글을 써내려가다 보니 꽃보다청춘과 내 심장을 쏴라, 사이의 간극을 매우기가 쉽지 않다. 

그냥 읽다가, 보다가, 내가 뜨거워졌다, 그거 하나만은 확실한데. p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