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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326
가끔,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던 때의 내 기분이 그리울 때가 있다. 참, 세상엔 널린 게 책인데 재미있는 책을 만나기가 이렇게도 어렵구나. 며칠 전 도서관에 들렀을 때도 세계문학상 수상작 혹은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을 읽을 때의 그 흥분 상태에 도달한 내 기분을 찾고 싶어 오래 머무르며 책을 골랐다. 한국 소설과 외국 소설 코너를 전부 기웃거리며.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뒤적이며. 그렇지만 아직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았거나, 혹은 읽었거나.
그러다가 이 책을 어떻게 손에 쥐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종산의 코끼리는 안녕, 을 옛날 옛적에 현수와 중고 책방에 가서 싸게 구입했다. (그게 기억이 나다니) 아마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였을 거다. 나는 표지에 혹은 글씨체에 종종 속는다. 코끼리는 안녕, 도 처음 읽을 땐 속은 기분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도로 덮었다. 그리고 시간이 꽤 흘러 작년, 다시 도전했을 때 성공했고, 재밌었고, 그러나 포스팅에 실패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책을 읽은 그 직후의 느낌을 잃어서 그냥 창을 닫았다.
게으른 삶, 은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새벽에 책상 앞에 앉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너무너무 재밌었다. 피식 웃기를 백번! 아니 이렇게 담백하면서 산뜻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뭐랄까 주인공 너구리에게 감정이입도 되는 것 같고. 정말로 난, 이종산 작가를 만나고 싶어졌다. 88년생 나랑 동갑인 작가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참치와 나누던 대화처럼. 그게 어렵다면, 게으른 삶, 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끼리의 만남을 주선해볼까. 드라마 네멋대로해라, 를 너무 좋아하여 2002년에 개설된 다음 카페는 네멋 하나로만 뭉쳐 여태까지도 운영되고 있는데, 책이 좋아 만난 사람들도 그 정도 지속되지 못하랴. 허황된 꿈을 잠시 꿔보았다. 선정쌤에게 연락해볼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재밌어서 책 꼭지를 너무 많이 접었다. 미안했다. 난 누군가가 꼭지를 접어둔 페이지를 만나면 오히려 반갑고 고맙다. 밑줄을 그어주면 더 좋다. 그렇지만 여럿이 함께 보는 책엔 꼭지 접기도 낙서도 하지 말라고 배웠으니 누군가에겐 미안해하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진심은 아니다. 다음 날 바로 서점에 가 새 책을 샀다. 내 책엔 연필로 열심히 밑줄을 그어야지. 그리고 빌려줘야지. 마치 신데렐라를 찾는 기분으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을 찾습니다.
읽기 전에 복잡했던 머릿 속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단순해졌다. 자꾸 막막하다는 너구리 덕분에 내 막막함이 조금 덜어졌다. 나보다 너구리가 더 막막해보여서. 역시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한결 나아진다. 이 날은 기분이 나아졌다.
2. 0327
우리집은 지난주 일요일, 게으름병에 걸렸다. 특히 아빠가 좀 심했는데 꾸쑝을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 임무를 맡은 우리 아빠는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나간다더니 커피를 다 드시고는 그대로 소파에 누워 곤히 주무셨다. "엄마! 아빠가 또 자" 엄마한테 일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코까지 드르렁 고시는 아빠를 보며 엄마는, 커피를 너무 많이 드셨나보다, 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그냥 웃겼다.
외출하고 들어왔는데 꾸쑝이 없었다. "엄마, 꾸쑝은?" "없어" 난 또 엄마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이불 속에서 꿈지럭 꿈지럭하며 꾸숑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하고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 없었다. 꾸쑝은 요도에 결석이 생겨 입원을 했다고 했다. 우리 애기가 입원이라니! 병원이라 그러면 몸을 발발 떠는 우리 꾸쑝이 입원을 했다니.. 와다다다다다 하면서 발자국 소리 내며 달려와 이불 위로 짠! 하고 고개를 내밀어주는 우리 꾸쑝이 내일 아침 수술을 한다니.
허전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3. 0328
게으른 삶, 을 다 읽었다. 사람 게으르게 만드는 데 일등 공신인 우리집 소파에 기대어 앉아 크라운산도를 우걱우걱 먹으면서 책을 읽었다. 세상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읽다가 졸리면 누워 잤고, 자다가 이건 게을러도 너무 게으른 것 같은 마음이 들면 다시 일어나 게으른 삶, 을 읽었다. 지금 내 모습이 책 제목과 잘 어울려서 더 좋았다. 아마 버테코에 다닐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이 정도로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꾸쑝이 없으니 내가 할 일이 더 줄었다. 맘마랑 물 챙겨주는 일도, 기저귀 갈아주는 일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 게을러져서 소파에 누웠다가 엄마방에 누웠다가 오빠방에 누웠다가, 했다. 내 방엔, 침대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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