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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식물생활] 안난초


1. 나는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책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2. 가수 요조가 운영하는 책방무사에 방문한 어느 날, '식물생활'을 만났다. 가만 생각해보니 작년 8회 UE(Unlimited Edition)에서도 만난 적 있던 책인데, 그 땐 엽서만 구경하다가 조심히 두고 왔던 기억이 난다. 


출처. 트위터 책방 무사 @musabooks




3. 식물생활은, 그러니까 나를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내 친구를 위한 책이었다. 나무를, 초록을, 식물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격하게 공감해줄 것 같은 기대. '주는 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그런데 식물생활 앞 부분을 읽다보니, 이게 뭐야, 내가 더 재밌어, 하면서 내가 갖고 싶어진 책(ㅋㅋㅋ)이다. 재밌다는 표현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뭐랄까, 식물에 조금의 관심도 없던 내가, 키웠다 하면 선인장도 죽이고 마는 내가, '이상하다, 식물 키우는 거 참 좋은 것일 수 있구나'하고 내 관심 밖에 있던 것이 내 관심 안으로 빨려 들어오면서 경험한 묘한 기분,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예를 들면, 아주 작은 소소함으로 내 옆에서 나도 모르게 날 기쁘게 해주던 것들이 열 개가 있었는데, 이젠 열 한 개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하, 어렵다)

 



4. 내가 가장 크게 고개를 끄덕였던 부분은 ↓

"요리하는 것과 식물을 키우는 건 비슷한 일인 것 같아. 어떤 책에서 저자가 지능과 재능, EQ를 8가지로 분류하는 걸 봤는데, 식물을 기르는 거랑 요리하는 게 같은 재능이라고 하던 게 기억에 남아. 요리를 하려면 계절마다 제철 재료를 사게 되잖아? 그것처럼 계절마다 나오는 꽃도 종류가 다르고 말야. 그런 걸 보면서 아주 커다란 리듬에 맞추어서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거든. 땅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그런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이 좋아." 15p




5. '생각해보니 식물을 좋아하는 그 친구는 요리도 좋아하는데!' 그 친구를 생각하며, '아 나는 여전히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들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좋은 것이겠구나'하고 그 친구의 취미를 정말 가치있는 것으로 공감하게 되는 그 기분. 이 책을 읽고 또 고르는 데까지, 내가 느낀 재미와 기쁨은 이런 것들이었고, 그래서 굳이 (식물을 키우는) 친구를 주지 않고 (식물을 키우지 않는) 내가 갖고 있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그림책이다.




6. 나무와 초록, 그래서 여름을 좋아하는 친구의 블로그 http://cloudtreesummer.blogspot.kr/




7. 여행 중에도 어쩜 그렇게 나무에 눈길을 주던지, 관심이 생긴다는 것은 확실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끔 한다.

아래 사진들은 전부 친구가 찍은, 부산 여행 중에 만난 나무들 -









8. 나무 이야기를 하다보니 생각난, 김숨의 단편 소설 '뿌리 이야기' ( http://youneverknow.tistory.com/595 )

이 책을 읽었을 당시에도 너무 큰 충격이라고 해야하나, 나무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가질 수도 있구나, 하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식할 때 나무가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인간이 전혀 못하는 것 같아."

"태어난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나무가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른다는 듯이 말이야. 나무가 온 에너지를 다해, 온 집중을 다해, 전력투구로 서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듯이 말이야."

"어째서 실뿌리 한 가닥까지, 모세혈관 같은 실뿌리 한 가닥까지 나무가 온전히 제자리에 서 버티고 있을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한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거지?"

"나무는 자신이 태어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존재야. 죽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존재지. 태어난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늙고, 병들고, 조용히 죽음을 맞는 존재. 태어난 자리와 죽는 자리가 같은 존재."


"이 나무들이 얼마나 멀리서 날아왔는지 알아?"

어디서 그 나무들을 데리고 왔는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H은행 본사 건물 앞에 최초로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가 심긴다는 소식이었다. 유명 건축가가 설계해 지은 건물 앞에 심길 메타세쿼이아들은 그즈음 신문에 실릴 만큼 화제였었다.

"천 이백 킬로미터."

"...?"

"이 나무들이 이동해온 거리 말이야. 인간이 이 나무들을 태어난 자리에서 천이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데려다 놓은 거야. 생각해봐. 한번 뿌리를 내리면,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일 미터도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천이백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날아왔다고 생각해봐.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만 이동해도 시차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나무가 감당해야 하는 시차는 어째서 생각 못 하는 거지? 뿌리가 들릴 때 나무가 감당해야 하는 공포에 대해서는 어째서 생각 못 하는 걸까."


뿌리 뽑힐 듯 흔들리는 메타세쿼이아들보다 그는 더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의 발등에 못이라도 박아 넣고 싶은 심정이도록. 그를 붙들어둘 수 있다면 발가락마다에라도, 발가락 마디마디에라도.


"얼마나 공포를 느꼈을까? 뿌리 뽑힐 때 메타세쿼이아들이 얼마나 공포를 느꼈을까?" 35




9. 마무리하면서, 식물생활 내에 인용된 헤르만 헤세의 글을 소개하고 싶다.


"수천가지의 사소한 일들에서 우리는 작은 기쁨들을 찾아내고 밝게 꿰어서, 삶을 엮어갈 수 있다. 일상적으로 구원을 받고 짐을 벗고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 아니라 작은 기쁨이 필요하다." _ 헤르만 헤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작은 기쁨' 중에서




10. 앗 그러고보니 내가 1월 1일에 쓴 글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2017년에는 이런 기분으로 보내고 싶다는 막연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뭔갈 대단히 작정할 필요는 없고, 다만 아주 사소하고 소소한 것으로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여유,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한 작은 노력, 나 스스로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는 시간, 그러니까, 내가 나를 아껴주는 마음"




11. 식물생활 하나로, 수많은 점들이 이어져 하나의 선이 된 포스팅(ㅋㅋㅋ)인 듯.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