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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환상통] 이희주, 문학동네 (제 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미칠 수 있을까. 내 몸의 온 세포가 그들을 향해 있던 시절, 열넷에서 열다섯 사이. 팬질이라면, '빠순이'라 폄하되는 활동이라면 누구 못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던 때. 그런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는커녕 오히려 내 마음 한 구석에 둥지를 틀어, 스물아홉이 된 지금까지도 내 삶의 든든한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이때부터 정말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법을 몸으로 익힌 것 같다. 나의 온 마음을 인투해서 쏟아부어 사랑함으로써 속절없이 빠져들었던 내 감정을 미련없이 털어낼 수 있었던 그 때의 사랑하는 습관이 지금의 내게 고스란히 남아있다. 음식이나 작은 습관은 물론이고, 취미활동에든, 그리고 사람에게든. 내가 그런 식의 사랑을 한다는 것을 처음 인지했을 땐 '나 왜 그래'하며 자책했지만, 이제는 고맙다. 무엇에든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내 건강한 사랑이:-) 그리고나서, "응 나 정말 사랑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까지도.

현실에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훨씬 더 강렬한 것일지라도, 그들을 좋아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 지, 그 피드백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팬으로써의 사랑은, 그들이 알아줄 수 없는 마음이기에 허무한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껏, 충분히, 아낌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경험이기에 분명 소중한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참 질리지도 않고 여태 잔잔하게 남아서, 아직도 god 콘서트를 말없이 그렇지만 온 마음으로(!) 기다리는 스물아홉이다.

그 당시, 날 혼내키기는커녕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해주어 나의 빠순이 활동에 금전적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던 우리 엄마아빠한테는 정말 평생 갚아도 모자랄만큼 감사한 마음이 남아 있다. 그렇게 정신 놓고 미쳐있는 딸을 단 한 번 말리지를 않았다니. 생각할 때마다 놀라운 사랑과 인내심이어라 (ㅎㅎ)


"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

이 한 줄에 내 마음을 뺏기어, "이건 꼭 읽어야 해, 무조건!" 하고 문학동네 북카페에 가서 다른 책 둘러보지도 않고 바로 골라 들었다. 그리고 작가 소개를 읽는데, 오마이갓, 92년생. 하아 같은 팬질을 하고도 누구는 이렇게 소설을 쓰고 나는............. 뭐 이런 아쉬움을 주는 출생년도랄까. 후후. 그래도 작가님, 이렇게 빠순이 이야기로 문학동네 대학소설상까지 수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팬질해본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소름이 오는, 공감의 소름이 돋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환상통
국내도서
저자 : 이희주
출판 : 문학동네 201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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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날, 텔레비전에서 단신으로 그 소식을 접하던 순간이 생생해요. 순식간에 가슴이 말린 무화과처럼 쪼그라들었지요. 누군가 어떡하니, 라고 말하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고...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순 있지만 받아들이진 못하는 상태로 한참을 정지 속에 서 있었습니다. 13


고민 끝에 내가 택한 것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그 안타까움을 받아들이는 쪽이었어요. 한순간을 미련 없이 사랑하자. 그리고 떠나보내자. 사랑을 그냥 사랑 그 자체로 두고 어떤 의도도 개입시키지 않기로 한 거지요. 그러다보면 어느 날, 처음에 느꼈던 솟구치듯 사랑하던 감정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24


사랑하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괴로워했다. 그랬기에 만옥의 얘기처럼 어떤 말로도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어에 그들을 가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몇 번이나 그들을 파괴하려고 했다. 66


불확실한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보다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70


그 시절 내가 자주 인용한 것은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었다. 퇴근길, 추운 저녁,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할 때면 나는 농담처럼 이 말을 만옥에게 던지곤 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ㅡ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71


첫째, 누군가에게 충고할 때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돌아봐야한다.

둘째, 그보다 아예 충고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닥쳐. 네가 하는 건 고귀한 사랑이고 내가 하는 건 노망난 짓이냐?

 노망난 짓이라고는 안 했는데. 그냥. 지겹지 않냐 이거지.

그가 발톱을 숨긴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 있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게 뭐가 지겨운 일인지 나는 생각한다. 지겹지 않다. 근래에 들어 나는 가능한 최대치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그를 두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사전녹화가 있는 날. 발걸음이 가볍다. 84


너는 일생을 사랑하는 걸 취미로 삼은 사람이었다. 본 영화도 읽은 책도 들은 음악도 많지 않았지만 사랑만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했다. 어느 날 고통에 못 이긴 듯 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병이야. 138


이게 뭐길래 얘가 미쳐가지고. 야, 그건 진짜 미쳤다고밖엔 할말이 없다. 너 누가 팬질하는 거 한번도 옆에서 본 적 없지?

본 적이야 있지. 근데,

아니, 내 말은 오빠 앞에서의 모습이나, 그런 절실한 걸 봤냐 이거지. 진짜 눈 돌아간 그 모습을 봐야 이해가 가거든. 인간 속에 저런 게 있구나. 막,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에너지가 뿜어져나온다니까.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