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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날, 텔레비전에서 단신으로 그 소식을 접하던 순간이 생생해요. 순식간에 가슴이 말린 무화과처럼 쪼그라들었지요. 누군가 어떡하니, 라고 말하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고...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순 있지만 받아들이진 못하는 상태로 한참을 정지 속에 서 있었습니다. 13
고민 끝에 내가 택한 것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그 안타까움을 받아들이는 쪽이었어요. 한순간을 미련 없이 사랑하자. 그리고 떠나보내자. 사랑을 그냥 사랑 그 자체로 두고 어떤 의도도 개입시키지 않기로 한 거지요. 그러다보면 어느 날, 처음에 느꼈던 솟구치듯 사랑하던 감정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24
사랑하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괴로워했다. 그랬기에 만옥의 얘기처럼 어떤 말로도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어에 그들을 가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몇 번이나 그들을 파괴하려고 했다. 66
불확실한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보다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70
그 시절 내가 자주 인용한 것은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었다. 퇴근길, 추운 저녁,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할 때면 나는 농담처럼 이 말을 만옥에게 던지곤 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ㅡ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71
첫째, 누군가에게 충고할 때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돌아봐야한다.
둘째, 그보다 아예 충고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닥쳐. 네가 하는 건 고귀한 사랑이고 내가 하는 건 노망난 짓이냐?
노망난 짓이라고는 안 했는데. 그냥. 지겹지 않냐 이거지.
그가 발톱을 숨긴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 있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게 뭐가 지겨운 일인지 나는 생각한다. 지겹지 않다. 근래에 들어 나는 가능한 최대치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그를 두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사전녹화가 있는 날. 발걸음이 가볍다. 84
너는 일생을 사랑하는 걸 취미로 삼은 사람이었다. 본 영화도 읽은 책도 들은 음악도 많지 않았지만 사랑만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했다. 어느 날 고통에 못 이긴 듯 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병이야. 138
이게 뭐길래 얘가 미쳐가지고. 야, 그건 진짜 미쳤다고밖엔 할말이 없다. 너 누가 팬질하는 거 한번도 옆에서 본 적 없지?
본 적이야 있지. 근데,
아니, 내 말은 오빠 앞에서의 모습이나, 그런 절실한 걸 봤냐 이거지. 진짜 눈 돌아간 그 모습을 봐야 이해가 가거든. 인간 속에 저런 게 있구나. 막,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에너지가 뿜어져나온다니까.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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