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생활/책

[사랑에 관하여] 안톤 체호프, 펭귄클래식


나는 아직 고전소설이랄까, 뭐 엄청 유명한 안톤 체홉, 톨스토이, 이런 작가들 책을 재미있게 읽지는 못하는가보다



사랑에 관하여
국내도서
저자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 안지영역
출판 :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02.05
상세보기



"이 정원이 성공을 거둔 까닭은 엄청나게 크고 일꾼이 많아서가 아니라네. 성공의 진짜 비밀은 내가 이 일을 사랑한다는 데 있단 말일세. 알겠나? 내가 이 일을 어쩌면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점 말일세. 날 좀 보게. 난 모든 걸 스스로 한다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지. 접붙이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고, 묘목도 심고, 모든 걸 나 스스로 하네. 누군가 날 도와주면 질투심을 느끼고 저속하다 싶을 정도로 짜증을 내지. 비밀은 모두 사랑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예민한 주인의 눈과 손, 그리고 어딘가를 방문해서 한 시간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혹시 정원에 무슨 일이라고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불안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그 마음에 있다는 거지. 내가 죽으면 누가 그걸 다 돌볼까? 누가 일을 할까? 정원사? 일꾼? 그럴까? 이보게 친구, 내가 얘기해 주지. 우리 집 일에서 가장 강력한 적은 말이야, 토끼 새끼도 아니고, 풍뎅이도 아니고, 영하의 날씨도 아니네. 그건 바로 애정이 없는 사람일세." 92


"됐어, 그만 됐어."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코브린이 말했다.

"한판 했고, 울기도 했으니 그럼 된 거야. 너무 오래 화를 내면 안 되지. 그건 나쁜거야. 게다가 아버지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97


손님들이 오면 갑자기 코브린이 출중한 미남이고 모든 여자들이 그에게 반해 자신을 부러워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때면 마치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쁨과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가 웬 아가씨에게 미소라도 한번 짓는 날엔 질투심으로 불타 벌벌 떨며 자기 방으로 가 다시 눈물을 흘려댔다. 이 새로운 감정은 타냐를 꼼짝도 못하게 사로잡아 그녀는 기계적으로 아버지를 도우면서도 복숭아, 애벌레, 일꾼들의 존재는 물론이고,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107


옛날 한 행복한 사람이 자기가 누리는 행복이 너무 커서 결국은 겁에 질리고 말았지. 그래서 신들의 자비를 얻기 위해 자기가 아끼는 반지를 제물로 바쳤다고 하더군. 알겠나? 폴리크라트처럼 나도 내 행복 때문에 좀 불안해진다네. 아침부터 밤까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오직 기쁨뿐이라는 게 좀 이상하단 말이야. 기쁨이 나를 온통 채워버려 다른 감정의 소리는 죄다 잠잠해지고 마네. 난 비탄, 슬픔, 권태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보다시피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지루하지 않아. 진지하게 말하는 걸세. 뭔가 좀 이상하단 생각을 하게 되네. 111


원래 본성이 고독해서 조개나 달팽이처럼 자기 껍질 속으로 기어들려는 사람들이 세상에 제법 많거든요. 어쩌면 이건 격세 유전 현상인지도 모르죠. 인간의 조상이 아직 사회적인 동물이 아니고, 외롭게 자기 굴에 살던 때로의 회귀라고나 할까요? (중략) 한 마디로 이 사람에게는 자기를 뭔가로 덮어 싸려는 극복할 수 없는 열망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고립시켜 외부의 영향에서 지켜주는 상자를 만들고 싶어 했다고나 할까요. 148


저는 그때 오래된 꿈을 너무도 명백하게 이룬 행복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삶의 목표를 이루고 원하는 것을 얻어 자기 자신과 운명에 만족한 인간을요. 182


행복한 사람이 평안한 건 불행한 사람들이 말없이 자기 짐을 지는 덕분이라는 게 명백하니까요. 불행한 사람들이 침묵하지 않으면 행복이란 불가능하겠죠. 이게 전체적인 가설입니다. 만족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모든 인간의 문 뒤에 누군가 작은 망치를 들고 서서 계속 두드려대며, 이 세상에는 불행한 인간들이 있고, 그가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삶이 언젠가는 자기 발톱을 드러내 병, 가난, 상실 등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 그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듯이, 아무도 그의 불행을 보거나 들을 수 없게 될 거란 점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망치를 든 사람은 없고, 행복한 사람은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거죠. 사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일상의 소소한 걱정거리들이 그를 조금은 동요시키겠지만, 모든 게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흘러가죠. 183


그리고 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황량한 파도 소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안식, 영원한 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얄타도 오레안다도 없었을 때도 이렇게 소리를 냈을 것이고, 지금도 소리 내고 있으며,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그때에도 이렇게 무심하고 황량한 소리를 낼 것이다. 이 항상성 속에, 삶과 죽음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 속에 우리의 구원과 이 땅에서의 삶 그리고 끊임없는 진보가 약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