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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숨 - 뿌리 이야기
"이식할 때 나무가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인간이 전혀 못하는 것 같아."
"태어난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나무가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른다는 듯이 말이야. 나무가 온 에너지를 다해, 온 집중을 다해, 전력투구로 서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듯이 말이야."
"어째서 실뿌리 한 가닥까지, 모세혈관 같은 실뿌리 한 가닥까지 나무가 온전히 제자리에 서 버티고 있을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한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거지?"
"나무는 자신이 태어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존재야. 죽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존재지. 태어난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늙고, 병들고, 조용히 죽음을 맞는 존재. 태어난 자리와 죽는 자리가 같은 존재."
"이 나무들이 얼마나 멀리서 날아왔는지 알아?"
어디서 그 나무들을 데리고 왔는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H은행 본사 건물 앞에 최초로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가 심긴다는 소식이었다. 유명 건축가가 설계해 지은 건물 앞에 심길 메타세쿼이아들은 그즈음 신문에 실릴 만큼 화제였었다.
"천 이백 킬로미터."
"...?"
"이 나무들이 이동해온 거리 말이야. 인간이 이 나무들을 태어난 자리에서 천이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데려다 놓은 거야. 생각해봐. 한번 뿌리를 내리면,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일 미터도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천이백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날아왔다고 생각해봐.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만 이동해도 시차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나무가 감당해야 하는 시차는 어째서 생각 못 하는 거지? 뿌리가 들릴 때 나무가 감당해야 하는 공포에 대해서는 어째서 생각 못 하는 걸까."
뿌리 뽑힐 듯 흔들리는 메타세쿼이아들보다 그는 더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의 발등에 못이라도 박아 넣고 싶은 심정이도록. 그를 붙들어둘 수 있다면 발가락마다에라도, 발가락 마디마디에라도.
"얼마나 공포를 느꼈을까? 뿌리 뽑힐 때 메타세쿼이아들이 얼마나 공포를 느꼈을까?" 35
>> 내가 우리 강아지,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에게 주는 그 마음을 주인공은 나무에게 주고 있었다. 나는 비록 나무에 감정이입을 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우리 애견들을 아끼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겠지, 생각하면 그 아픈 마음이 절로 이해된다.
그날 내가 그의 작업실을 찾은 것은 그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구해다 부려놓았을 뿌리가 궁금해서도 아니었다. 관성이라는 지팡이가 눈 먼 나를 그의 작업실로 이끈 것이었다.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관성'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뻑뻑하고 무거운 작업실 철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38
어릴 때 그가 경주에서 살았었다는 사실도 나는 불과 며칠 전에야 알았다. 굴참나무 뿌리에 촛농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면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경주에 살았었다고 말했다. 52
>> 이렇게도 잘 모르겠는 사람을, 그래도 그토록 사랑하는 그 마음을, 나는 짐작조차 못하겠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결혼 직후 신혼여행 길에서였나, 선영이 자꾸 광수에게, "우리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거야, 그치?"라고 마치 다짐을 받듯이 몇 번이고 물었고, 광수는 결혼 이후, 함께 알고 지내던 '진우'와 선영의 관계를 의심했으며, 그 의심하는 과정 중에 생각해보니 선영이 자신에게 사랑한단 말을 처음 내뱉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일련의 작은 사건들. 대체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김숨 - 왼손잡이 여인
"어디로 갔지..?"
부엌에서 저녁을 하던 아내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만 해도 나는 휴대전화를 찾는 거겠지, 생각했다. 냉장고 안을 살피고 식탁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욕실과 방들, 베란다를 분주히 오갔다. 전골냄비에서 조기찌개 국물이 흘러넘치는 줄도 모르고.
"뭘 찾는데?"
부엌으로 다급히 걸어가 가스레인지 불을 끄면서 나는 그녀를 다그쳤다.
"사라졌어.."
"뭐가?"
"손이.."
"손?"
그렇게 물으면서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왼손이.. 감쪽같이.." 64
설마 사라지고 없다는 착각에 아내가 사로잡히던 그 순간, 왼손이 저 스스로 무감각 상태가 되어버린 걸까?
비록 상상의 수준에서 거행된 거세에 불과할지라도, 아내의 왼손은 화단에서 뿌리 뽑혀 내던져진 식물처럼 시름시름 말라갔다. 쓰지 않고 고이 모셔두어 살이 통통히 오를 줄 알았는데 웬걸 비쩍 야위어갔다. 각질이 일도록 살결이 거칠어지고, 혈관들이 메마른 땅 위로 뻗은 덩굴줄기처럼 불거졌다. 더디긴 하지만 꾸준히 자라는 손톱만이 그녀의 왼손에 피와 영양분이 끊어지지 않고 공급되고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녀가 돌보지 않는 동안 제법 손톱이 자랐지만 거슬리지 않는지 그녀는 깎으려 하지 않았다. 치기공사이다 보니 자라기 무섭게 손톱을 바짝 깎던 그녀가 아니던가. 74
>> 최근에 읽은 채식주의자가 자꾸 떠올랐다. 채식주의자스러운 이야기.
# 조경란 - 기도에 가까운
제가 도로 묶어둬야 할까요?
그냥 두세요. 그 할머니가 알아서 할 겁니다.
고문님이 어떻게 아세요?
때를 기다리는 거겠죠.
빨래를 널어도 좋은 때를요?
집주인 마음이 풀어질 때를요.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던 때였다. 그 주 일요일 늦은 아침에 시장을 가려고 문을 밀고 나왔을 때 미호는 노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할머니는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빨랫줄을 계단 난간에다 묶었고 그 길이를 다 차지하는 첫 세탁물을 널어두었다. 186
어머니는 내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한 번 눈을 마주치는 게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걸 미호는 알아갔다. 192
연변 할머니에게는 집을 떠나던 날 문 앞에 귀머거리 개를 그냥 떠맡기듯 내려놓고만 올 게 아니라 제대로 부탁하는 말을 하고 왔어야 했다고. 개가 이유도 없이 허공을 보고 짖을 땐 손바닥으로 코를 가볍게 눌러주는 시늉을 하면 그만둘 거라는 말은 꼭 하고 왔어야 했을지 모른다. 어째서인가 한 이야기들보다 하지 못한 말들이 저 빗방울처럼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 같았다. 193
# 윤성희 - 휴가
그때마다 엄지와 검지에 수프가 묻었다. 나는 손가락을 빨았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이곳에 오는 이유가 어쩌면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222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세탁기를 돌리는 동안 잠깐 침대에 누웠는데 그 사이 잠이 들고 말았다. 일어나보니 두 시가 지나 있었다. 자는 동안 땀을 흘려 온몸이 끈끈했다. 다시 샤워를 했다. 이러다간 휴가 내내 샤워만 하는 거 아닌지. 222
"싫어. 나 휴가야. 일주일 동안 집에 콕 박혀 잠만 잘거야." 그러자 박이 삼계탕에 낙지를 넣어주겠다며 나를 꼬였다. 나는 낙지가 들어간 음식이라면 뭐든지 좋아하지만, 그래도 그걸 먹기 위해 집 밖에 나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223
"이게 편의점에서 제일 맛있는 안주예요?" 최대리가 말했다. 세 알씩 진공 포장된 메추리알조림이었는데, 사실 나도 좋아하는 안주였다. "이거 세 알과 맥주 한 캔이면 딱이지. 내 친구 중에는 이거 세 알로 맥주 세 캔을 먹는 놈도 있어." 내가 말했다. 최 대리가 자기 친구 중에도 그런 녀석이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날 나는 최 대리의 취미를 알게 되었다. 최 대리는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었다. 224
그러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참 쓸모없는 취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 "맞아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행복해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그러면서 최 대리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침이면 신문을 뒤져 전날 몇 명이 죽었는지를 세었다고. 그게 하루의 시작이었다고. 젊은 시절에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는 최 대리의 아버지는 신문 부고란을 읽을 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225
"만져 봐, 삼촌. 튀어나왔지?" 이마에 손을 대니 혹이 만져졌다. "아파?" 첫째는 아프지만 참을 만하다고 했다. "근데 이 혹에서 용기가 나오는 것 같아." 첫째는 혹이 난 후에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고백까지 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 혹이 영원히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 227
박은 달걀 프라이를 주지 않는 백반집은 엉터리라고 했다. 박이 생각하는 백반의 기준은 이랬다. 달걀 프라이를 일인당 하나씩 줄 것. 밥은 꼭 흰쌀밥이어야 할 것. 세 종류 이상의 나물이 나올 것.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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