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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2013 제 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1. 


이 책, 소장하고싶다.



2. 


지금 이 책, 제 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 그러다 2015 제 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며 혼자만의 추측으로 발견해낸 것이 하나 있는데, 매 회 묶이는 단편들이, 하나의 주제로 연결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꼭지 접은 페이지를 타이핑하며 또 한 번 느꼈는데, 대상 수상작인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 외에도 나머지 단편들에서 "침묵"이라는 키워드가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이 책을 골라들었을 당시, 내가 꽂혀 있던 단어가 "침묵"이었다. 꽂히는 단어가 주기적으로 바뀌곤 하는데, 이 시기엔 왜 그렇게 침묵이라는 단어가 시도때도 없이 보이고 들리며 또 내뱉어지고 쓰여졌던지. 결코 좋은 의미의 침묵은 아니었기에 그 시기를 잘 넘긴 것에 다소 안도감을 느낀다. 


내게 침묵은 첫째,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것이 입밖으로 탈출했을 때 가질, 그 언어가 뿜어낼 파괴력이 두려워 갖는 침묵이었고, 둘째, 역시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이 상대방과 충분히 교감되고 또 공유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측이 맞아 떨어질까봐 갖는 침묵이었다. 어떤 것이든 내게 침묵이란 답답함이다. 



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국내도서
저자 : 김애란,함정임,이평재,천운영,편혜영
출판 : 문학사상 201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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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애란 - 침묵의 미래


하지만 내가 볼 때 보다 이상한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욕을 먹을 때마다 미친 사람처럼 깔깔대며 엄청 좋아했다. 마치 그렇게 하대받아 기쁘다는 듯. 오랫동안 당신이 나를 이렇게 대해주길 기다려왔다는 듯 말이다. 그 얘기를 들은 뒤 나는 '세상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구나.'하고 고개 저었다. 75



# 편혜영 - 밤의 마침


기어이 벌금을 다 받아냈지만 그 돈으로 카메라도 시계도 사지 않는다. 아내에게도 선물하지 않는다. 얼마간은 술을 마시고 얼마간은 여자를 산다. 그 돈을 흐지부지 탕진하는 동안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자명해진 스스로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선량하고 성실하며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고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도 명확한 신념과 원칙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일로 그런 게 전혀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인간이란 신념이 흔들릴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법인데, 자신에게는 애당초 흔들릴 신념조차 없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에게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만이 있다. 198



# 이장욱 - 절반 이상의 하루오


 그의 글을 읽으며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탐닉도 희미해졌다. 마음이나 집중력이라는 것에도 탄생과 소멸의 주기가 있는 법이니까 - 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내가 헤어진 것 역시.

 어느 날인가 그녀가 나를 불러낸 적이 있다. 그녀는 2단짜리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에서 내린 모습 그대로 내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퇵느하는 길인 모양이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그녀는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데, 무언가 내 가슴속을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줄기 텅 빈 바람인지도 모르고, 늙은 나무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잎사귀인지도 몰랐다. 이것으로 그녀와의 관계가 과거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식사를 하면서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동시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255



# 이장욱 - 우리 모두의 정귀보


생활기록부에는 '성격 활달하지만 말이 없는 편'이라든가 '의외로 내성적이지만 인사성 밝음' 따위의 알쏭달쏭한 평들이 쓰여 있었다. 그건 고등학교 시절 정귀보의 담임을 맡은 교사가 우연히도 삼 년 내내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교사는 고질적인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인간은 언제나 양면적이며 모순적이기 때문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73


정귀보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긴 말은 여러 면에서 암시적인 것이었다.

 안녕. 아름다운 동화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냈는데도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으로, 그렇게 살아갈게. 77


무슨 생각을 갖고 소설을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면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생각이 거기에 있었다. 무슨 질문을 갖고 소설을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면 내가 던지지 않았던 질문들이 거기에 있었다. 소설의 몸, 소설의 육체란 대체로 그런 것이다. 내가 품지 못한 것들이지만, 소설과 인물이 스스로 품는 것들, 발생시키는 것들, 그리고 정귀보가 있었다. 106



# 윤이형 - 루카 


전날 밤부터 시작된 통화가 새벽 두시까지 이어졌고 나는 전화기를 든 채 잠들었다가 정오가 다 되어 간신히 눈을 떴는데 너에겐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너의 얼굴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하고 있었다 : 1)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나는 내 공간에서 몸을 움직여 네가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고 2) 내가 이렇듯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걸 네가 알아주었으면 하며 3)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함께할 이야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폭포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새들의 절박함과 시리고 날카로운 열정이 아니라 생활이 만들어내는 무해하고 보드라운 거품들과 건강한 웃음이 더 많았으면 해. 네가 말없이 하고 있는 말들이 나를 기쁘게 했고 나는 너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124


.. 미안하다는 말을 서로에게 아끼지 않았고 그 점을 걱정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방식이었으므로. 나는 너에게 정말로 미안할 때가 많았으므로. 나는 깔끔한 성격이 못 돼서 거실을 매번 어질러놓고 치우기 싫어하는 내가 미안했다. 네가 싫어하는 담배를 끊지 못하는 내가 미안했다. 나중에는 집에 생활비를 조금밖에 가져오지 못해서 미안했다. 무엇보다도, 네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는 미안했다. 134


언제부턴가 우리의 대화는 잘못 깎은 연필심처럼 끊겨나갔다. 그러지 않았던 날들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따위의 말이 나오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말이 나온다 한들 거기서 허망하게 대화가 끝나버리는 일도 없었으며 방에서 음악을 들을 때 서로에게 방해가 될까봐 이어폰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같이 듣고 같이 느꼈다. 139


그러나 그때는 우리가 길을 잃은 뒤,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우리는 너무 많이 오해했고 오해를 풀 기회를 너무 만히 놓쳤다.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습관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반복되는 내 의심과 추궁 때문에 너의 얼굴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며 죽은 것들은 되살아나는 대신 예전보다 더 죽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때쯤에는 나도 알고 있었다. 연인들이 서로에게 하는 어떤 말들, 이를 테면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피부색이 무엇이든 어디서 왔든 관계 없이 너를 사랑해, 같은 말들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 모든 것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네가 신의 말씀을 들으며 자라났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대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네가 너의 신에 대해 갖고 있던 불편하지만 온전히 떠날 수는 없다는 태도가 관계되어 있었다. 네가 가진 형제들과 내게는 없는 형제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너의 교회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했던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고 내 동료들이 너의 교회 같은 교회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는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 위해 너의 경제적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내가 품는 감정이 관계되어 있었다. 내가 나를 위해 포기한 것들이 나를 건드리는 방식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런 나를 보는 너의 표정이, 무엇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도달하는 침묵의 농도와 빛깔, 어떻게 해도 ... 146


다른 부분들도 걱정한 것만큼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부를 때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열어야 한다는 점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날 그 교회에서 나는 너의 신에게 너와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부활절 달걀을 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함께 먹었다. 오직 헤어진 사람들만이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다정한 얼굴을 하고.

 루카, 나는 너에게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 역시 내가 왜 딸기인지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그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