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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스틸 앨리스] 리사 제노바, 세계사


이 책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앨리스에 대한 이야기야. 하버드 대학 교수이자 한 남자의 아내, 세 자녀의 엄마이기도 한 앨리스. 이미 주제만 들어도 눈물이 펑펑 흐르겠다 싶어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읽었는데, 『나 아닌 다른 삶』 읽을 때보다는 덜 울었어. 난 왜 꼭 밤늦게 소설책을 펼쳐서 펑펑 울어대는지. 다음 날 또 눈이 붓고 말았어. 그래도 괜찮아 오늘 난 아무데도 갈 데가 없거든(ㅋㅋ)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서, 자, 네가 하버드 교수라고 생각해봐. 얼마나 똑똑하겠어. 아는 것도 많고, 논리적이고, 설득하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 막힘이 없어. 그런데 어느 날, 강단에 서서 특정 단어를 잊어버려. 저녁에 동네 달리기를 하다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렇게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해. 폐경기 증상이려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한 증상이려나, 혹은 우울증이려나. 이런 저런 추측을 해보지만, 결론은 알츠하이머. 나이 쉰에 찾아온 '조발성 알츠하이머'. 정말 충격적이겠지.



생각해보니 '내 머리속의 지우개'도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였네. 대강의 느낌은 기억이 나. 그래도 이렇게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주인공의 속마음과 그의 삶을 글로써 접한 것은 처음인지라 조금 새로웠어. 하루하루 죽어가는 뇌세포들로 인해 나조차도 나를 믿을 수 없게 되는 상황들. 차라리 암이면 이겨내야 할 대상이 있고, 이길 가능성도 높으며, 투병 생활을 하는 자신에게 모두가 응원해주겠지만, 치매 걸린 환자에겐 '이겨내야 할 대상'이 없다, 응원이 아닌 연민의 눈빛, 공포의 눈빛을 보낼 뿐이다, 라는 앨리스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했지. 항암 치료 중인 우리 엄마는, 내가 봐도 대단하고 멋있고, 그리고 끝내는 이겨낼테니까. 희망이 있는 거거든. 그렇지만 알츠하이머는 아니니까. 휴. 앨리스를 대하는 남편 존의 태도만 봐도 절망적이야. 맞아, 힘들겠지. 하루하루 망가지는 앨리스를 하루종일 옆에 두고 바라만 봐야 한다는 건. 숨막히겠지.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을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한편,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후의 앨리스와 리디아의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긍정적인 변화를 보였어. 대학에도 가지 않고 연기 연습만 하는 막내딸 리디아에 대한 앨리스의 의견은, 그래도 대학에 가서 학위를 따야 한다, 였어. 리디아는 필요 없다, 입장이었고. 


"난 배우가 되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니야. 대학에 안 가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존, 그 아이가 가게 될 길의 시간의 문이 빠르게 닫히고 있어. 당신은 그 아이가 시간 낭비하는 걸 도와주고 있고."

"너도 대학에 가면 좋을 텐데." 앨리스가 말했다. "엄마, 제발요." 218

"리디아, 대학에 가서 연극학 학위를 따는 게 어떻겠니?"

"엄마, 제가 방금 한 얘기 하나도 못 알아들으신 거예요? 전 학위 같은 건 필요 없어요." 226



하지만 앨리스도 얼마 안 남은 자신의 '정상적인' 삶을 생각하며,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의 진짜 욕구에 귀 기울여 보니, 실제로 대학 학위와 관련된 건 하나도 없다는 걸 발견하게 돼. 명예적인 것, 지적인 욕구에 관한 것들은 실은 무의미한거지, 얼마 남지 않은 삶에 있어서.


앨리스는 진짜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렸고 병을 고칠 가망도 없는 두 가지 약에 의존하고 있으며 알츠하이머병을 다른 치유 가능한 병과 바꿀 수도 없는 마당에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시험관 아기 시술이 성공한다면 안나의 아기를 안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리디아가 자랑스러워하는 연극 무대에 선 모습도 보고 싶었다. 톰이 사랑에 빠진 모습도 보고 싶었다. 존과 안식년을 한 번 더 보내고 싶었다. 읽는 능력을 잃기 전에 원 없이 책을 읽고 싶었다. 앨리스는 방금 든 생각들에 놀라며 실소했다.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에 언어학이나 강의, 하버드와 관련된 건 하나도 없었다. 170



앨리스를 돌보기 위해 리디아가 앨리스네 집에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 '대학도 안가고 연기하는' 막내딸이라는 수식어를 지우고 점차 리디아의 참모습을 알아가게 돼.


앨리스의 직감대로 희곡을 읽는 것이 소설이나 전기를 읽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리고 책을 읽은 뒤 그것이 1막이든, 1장이든, 아니면 작품 전체든 리디아와 바로 토론을 벌이는 것이 기억력을 강화시키는 즐겁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앨리스는 리디아와 함께 장면과 인물, 플롯에 대해 분석하면서 딸이 깊은 지식과 인간의 욕구, 감정, 갈등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지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디아의 참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녀는 새삼 딸에게 애정을 느꼈다. 238


앨리스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복잡한 대화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말이 아닌 것, 즉 몸짓이나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은 더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2주 전쯤 리디아에게 그런 현상에 대해 설명했는데 리디아는 그게 배우들이 부러워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배우들이 서로의 행동과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말과 언어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앨리스는 그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으나 엄마의 핸디캡을 부러운 기술로 여기는 리디아가 사랑스러웠다. 242



점차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가는 앨리스와 리디아의 관계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웠어. 이전에는 남자친구 멜컴?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의 직업적 신분이나 지위 자체를 보고 논하였다면, 이제는 리디아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의 의미를 물어보고, 리디아의 미래를 결정할 때에도, 부모님의 뜻에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라고 말하지. 가족 중에서 그 어떤 사이보다 가장 멀었던 앨리스와 리디아. 서로를 가장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명이, 슬프게도,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서 가장 가까워져.


"어떤 사람이니?"

리디아는 대답에 앞서 미소를 지었다.

"키가 아주 크고 야외 활동을 좋아하고 약간 수줍음을 타요."

"너한테는 어떤데?"

"정말 잘해줘요. 제가 똑똑하다는 걸 좋아하고 연기하는 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해요. 저에 대해 하도 자랑을 해대서 당황스러울 정도라니까요. 엄마도 그 사람이 마음에 드실 거예요."

"넌 그와 함께 있으면 어때?"

리디아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저다워져요."

"좋아." 326


"그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하지만 아빠가 뉴욕의 일자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요?"

"이런 결정을 할 땐 딴 사람의 사정에 따라선 안 돼요. 자신의 공부가 달린 문제니 스스로 결정해야지. 스물넷이면 성인이니 아버지 뜻에 꼭 따를 필요는 없어요. 자신의 인생에 맞는 결정을 내려요." 366


"엄마, 우리 많이 가까워졌어요." 367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나.  


"엄마, 이거 수업 시간에 할 독백 부분인데 듣고 무엇에 관한 것인지 말해 줄래요? 줄거리가 아니라 느낌으로요. 좀 길어요. 단어들을 기억할 필요는 없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만 말해주세요. 제가 이 독백을 하면 어떤 느낌이었는지 말해주는 거예요, 알았죠?"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배우는 독백을 시작했다. 앨리스는 그녀를 바라보고 독백을 들으며 여배우가 하는 말 너머에 있는 의미에 집중했다. ...(중략) ... 여배우가 독백을 멈추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앨리스를 보며 기다렸다.

"좋아요, 뭘 느꼈어요?"

"사랑을 느꼈어. 그건 사랑에 관한 얘기야."

여배우가 환호성을 올리며 앨리스에게 달려와 그녀의 뺨에 입맞추고는 기쁨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내가 제대로 느낀 거야?"

앨리스가 물었다.

"네, 엄마. 아주 정확하게 느낀 거예요." 410 



『스틸 앨리스』는 사랑에 관한 얘기야. 사랑을 느꼈어. 마음이 꽉 차오르는 따뜻한 사랑.

내가 원래 줄거리 요약에 취약한데, 『한국이 싫어서』의 편지체 말투를 모방하니 좀 편안해지는군.ㅋㅋ 하다보면 늘겠지. 이제 끗.




스틸 앨리스

저자
리사 제노바 지음
출판사
세계사 | 2015-04-1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야기 뉴욕타임스, 아마존...
가격비교



"당신 커피 싫어하잖아."

존이 말했다.

"아니, 좋아해."

"아니, 안 좋아해. 이 사람은 레몬차로 줘요."

"나도 커피랑 계피빵 먹을 거야."

제스는 존이 다시 받아치나 보려고 존에게 눈길을 주었으나 랠리는 거기서 끝났다. 135


앨리스는 물가로 걸어가서 바닷물에 발을 맡겼다. 따스한 물결이 다리를 핥았다. 206


앨리스는 두 시간 정도 혼자 일어나 있었다. 그 새벽의 고독 속에서 그녀는 녹차를 마시고 책을 좀 읽은 뒤 정원 잔디밭에서 요가를 했다. 다운독 자세를 하며 폐에 달콤한 아침 바다 공기를 가득 채우고 허벅지 뒤쪽과 엉덩이 근육을 팽팽하게 당긴 채 고통에 가까운 기묘한 쾌감에 탐닉했다. 엎드린 자세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팔뚝 근육이 왼쪽 눈 귀퉁이로 보였다. 조각처럼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몸 전체가 강인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235


앨리스는 알츠하이머병이 악마가 자신의 뇌에서 '현재의 리디아'와 '과거의 리디아' 사이의 연결망을 끊어놓고 '찰리' 관련 연결망은 그대로 두는 식으로 비논리적인 파괴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281


하버드 코멘스먼트 (미국 대학에서는 졸업을 graduation이 아닌 졸업과 시작을 의미하는 commencement라고 한다)

코멘스먼트. 하버드 졸업. 시작. 앨리스는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하버드 졸업은 시작을, 어른의 시작과 사회생활의 시작, 하버드 이후의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