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즈음, 중앙장편 문학상 포스팅을 하면서 눈에 익었던 책.
너무 최근에 나온 책이라서 설마 도서관에 있을까 했는데 813.7 선반쪽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에 뙇! 바로 골라 집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표지에 비해서 속내용은 많이 다르다.
어쩔 수 없이 피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우리와는 결코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중앙역'의 노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중앙역에 '노숙'하려고 갓 들어온 한 남자가 있다.
우리는 그 남자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 수 없다.
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았었는지,
그가 끌고 온 캐리어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이름은, 나이는, 체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역사에 노숙하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그리게 되는 이미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작가는 정말 무심하게, 끝까지 아무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 남자가 '사랑'하는 한 여자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다만 남자에 비해 나이가 많다는 것. 병이 있다는 것. 술을 좋아한다는 것. 배에 복수가 차올랐다는 것. 이정도.
"그"는 캐리어와 함께 나타난다. 첫 페이지를 열면, 그는 캐리어를 끌고 잘 자리를 찾고 있다. 며칠이나 되었는지, 왜 오게 되었는지, 몇 살인지, 키는 얼만하며, 몸집은 어떤지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캐리어와 함께 중앙역에 도착했을 뿐이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개연성 혹은 인과성이라 불리는 소설의 관습들은 그의 형체가 서둘러 그려질 것을 재촉한다. 그가 등장했으니 우리는 그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303 작품해설 중
그러나 읽다보면 그러한 궁금증은 점점 사라지고,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남자가 여자를 정말 사랑하는가? 그것이 사랑인가?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가?
이 책에서 작중 화자인 '나'도 '여자'도, 심지어 지원센터 '팀장'도 자꾸 묻는다.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가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가
너가 하는 것이 정말 사랑이냐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아직도 아리송하다.
사랑이네, 했다가 이건 사랑이 아니야, 라고도 했다.
그래도 끝내는,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면, 나를 움직이게 한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다면,
그건 충분히 사랑이 될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랑'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인공: 나, 여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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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젊고 건강한 내게 가장 인색하고 야박하게 군다. 내가 가진 젊음을 대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이나 젊은 나를 부러워하긴 마찬가지다. 마치 굉장한 걸 가진 것처럼 생각한다. 소진해야 할 젊음이 버겁도록 남았다는 게 얼마나 막막한 일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3
그러면서 나는 단 하나의 감정이 다른 감정들을 모두 압도하기만을 바란다. 나약한 감정들이 다 스러진 다음 끝까지 남아 있을 감정 하나를 기다린다. 결국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는 진짜를 찾는 것이다. 147
이 일은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든다. 뭔가 없는 걸 만들고 생산하는 것보다 이미 있는 걸 없애는 쪽이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 노력 없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면 그걸 부수고 망가뜨리는 데는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힘과 노력으로도 그것들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처음의 상태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150
때때로 슬픔은 피로와 무기력의 모습을 가장하는 법이다. 165
너 가장 나쁜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아니?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 가장 나쁜 거다. 만족하게 하고 이대로 충분하다고 생각해버리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건 서로를 망치는 거야. 182
공중을 떠다니는 비닐봉지처럼 쓸모없고 형편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183
나는 광장을 가득 메우고도 남는 거대한 시간을 생각한다. 깎고 자르고 조각내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쥐고 있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설명하려 한다. 도대체 버리고 버려도 다하지 않는 그 시간을 어떻게 써버려야 하나. 당신은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그 시간을 내내 맑은 정신으로 바라볼 자신이 있나. 222
다들 제 처지를 설명하기 바쁘다. 언제나 그들은 말하고 나는 듣는다. 모두에겐 다른 사람들의 이해가 닿지 않는 사정이 있다. 나는 혼자서 거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내 처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런 내 이야기를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일방적인 말 때문에 숨이 막힌다. 254
어쩌면 나는 가진 돈을 모두 여자의 병원비로 쓰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런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같은 자리를 맴돈다. 맴돌기만 한다. 한가운데로 들어가 내 진심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다. 그러나 나는 주변을 서성거리고 또 서성거리다가 결국 내 진심과 똑바로 맞닥뜨리고 만다. 내가 묻는다.
자, 네가 지금 병원으로 달려가지 않는 이유가 뭐지. 262
여자와 사이좋게 술 한 병을 나눠 마시고 깊이 잠들고 싶다. 지금 바라는 건 그게 전부다. 다른 것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 오늘이 얼마나 길고 길었는지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나는 보폭을 넓혀 속도를 낸다. 282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백 년이나 이백 년 동안 계속 살아 있었던 것 같다. 283
물 위에 흩어지는 물감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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