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는,
내 주변에는 이리도 책을 추천해줄 사람이 없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이 책 너무 괜찮다고 추천하고 싶은데, 내 추천을 받아서 실제로 이 책을 읽을 만큼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쉽다.
군대 말투 재밌다.
틱틱거리는 말투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함이 좋았다. (소설 속 말투... 실제로는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띄엄띄엄 읽어나가다 한 구절에 머물렀다. 노란 포스트잇 위의 붉은 글씨가 강렬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성경에 그런 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에스겔 16:6) 57
"애처럼 코코아가 뭐냐? 커피 안 마셔? 너 담배도 안 하지?"
"그렇습니다."
"술도 별로 안 할 것 같고.. 무슨 재미로 사냐?"
"그런 것들 안 한다고 사는 재미가 없으면 너무 서글픈 인생 아닙니까?"
"말은 잘해요. 마음의 양식을 많이 처먹어서 잘하나?"
박대위가 코코아를 뽑아 건넸다. 70
이제껏 수많은 책을 읽었다. 지루한 책도 있었고, 어려운 책도 있었지만 나는 중간에 책을 덮은 적이 없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만큼 나는 책을 좋아했다. 지루하다고 쉽게 책을 덮는 사람은 실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삶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덮을 수 없는 책이다. 결코 소설같이 흘러가지 않는 일상의 지루함이나 남루한 현실의 한 페이지도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94
하지만 실연을 당했다고 죽는 쪽도 사랑이라 부르긴 어렵다. 아버지는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불완전한 두 사람이지만 함께하면 완전해지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고 말했다.
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으며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가 없으면 죽겠다는 사람과는 만나지 마라. 사람은 사람을 채워줄 수 없다. 날 채워줄 수 없는 사람에게 나를 채워주길 기대하고 요구하니까 결국은 바닥을 드러내고 메말라 갈라져버린다. 자신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남겨진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포도 향만 첨가된 탄산 주스처럼 그것은 사랑이라 불렸을지 모르나 실체는 다른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세워주는 것이다.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명을 낳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도 사랑은 가슴에 남아 그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한다. 나는 누구보다 너와 엄마를 사랑하지만 너와 엄마가 없어도 살 수 있다. 너도 그래야 한다."
오해였지만 함께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겠다며 시작한 결혼 생활은 교통사고로 끝이 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의 삶을 파괴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상실감이 아니라 아버지가 남긴 사랑의 온기를 따라 살았다. 어머니는 장례를 마치고 몽골로 떠났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111
"제 잘못입니다. 그때 이야기를 들어줬어야 했는데. 그럼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주님이 그 사람을 구할 마지막 기회를 제게 주셨는데. 제가 미움이 사로잡혀서 외면해버렸습니다."
나는 박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박걸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사이비야, 성경 어디에 잘못하면 자살하라고 쓰여 있냐? 네 말대로 권중현 같은 인간도 사랑하는 하나님이 네가 죽으면 잘 죽었다고 퍽이나 좋아하겠다. 다른 생명 귀한 줄은 알고 네 생명 귀한 줄은 모르냐? 다른 사람 사랑하는 건 알고 네가 사랑받는 건 몰라? 매일 새벽마다 가서 뭐 했냐?
박걸은 머리를 잡은 채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너무 세게 때렸나 걱정이 됐다.
"괜찮냐?"
나는 박걸의 등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박걸의 등이 흔들렸다. 뜨거운 눈물이 얼어붙은 땅에 떨어졌다. 149
"뭐가 그렇게 심각하십니까?"
박걸이 생각에 잠겨 있는 나에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니. 그게 오늘 새벽에 죽으려고 했던 놈이 할 대사냐?"
박걸은 멋쩍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병장님."
"왜?"
"저 벽에 햇빛이 비치는 거 보이십니까?"
박걸이 가리키는 곳은 우리가 앉은 벤치에서 보이는 건물 외벽이었다. 베이지색 벽에 겨울 햇빛이 사선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저게 왜?"
"저게 너무 예뻐 보입니다."
"어?"
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입니다. 갑자기 세상이 좋아 보입니다. 이 추운 공기도 신선하게 느껴지고 지나가는ㅅ ㅏ람들도 다 좋아 보입니다. 신기합니다. 아무것도 달리진 건 없는 데 말입니다."
박걸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달라진 모양이지. 난 추워죽겠구만."
나는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맞습니다. 저는 오늘 거기서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것 같습니다."
한동안 아이 같은 눈으로 자신 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던 박걸이 나를 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 너 살리라고 보낸 천사 아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압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어떻게 사람이 천사가 되겠습니까?"
"그럼 잘 믿으면 뭐가 되냐?"
"사람이 됩니다."
"그게 뭐야?"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하지만 박걸은 진지하게 다시 말했다.
"사람다운 사람 말입니다." 158
"어, 아들. 웬일이야? 휴가 나와?"
내가 전화를 거는 건 휴가 날짜가 잡혔을 때뿐이었다. 나는 용건이 없으면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어요."
"그냥? 우리 아들은 그냥 전화를 거는 사람이 아닌데요, 누구시죠?"
"아, 난 그냥 걸면 안 돼요?"
"무슨 일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내가 진짜 잘못 살았구나."
"그걸 이제 알았니? 무슨 일이야?"
"......"
나는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모든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몰랐다.
"좀 복잡해요.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바보가 된 거 같아요."
어머니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불편해질 때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좋구나."
"네? 아들이 바보가 된 거 같다는데 좋아요?"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해서 좋단 거야.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네, 별일이 많았어요. 지금도 많구요.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좋아."
"아까부터 뭐가 자꾸 좋아요?"
"자기가 바보란 걸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야. 책 좀 읽었다고 그럴싸한 말만 늘어놓는 줄 알더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너한테 나쁜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간만에 전화했는데 해줄 이야기가 그런 것뿐이에요? 나 이제 들어가봐야 돼요."
점호 시간이 다가오자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이 병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가야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기도할게. 넌 혼자가 아니란 것만 잊지 마라."
"네, 가볼게요. 끊어요."
나는 갑자기 사랑한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멋대가리 없는 인사만 남기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180
"저흰 거의 따로 놀았는데.."
"그러니까 더 튀지. 밤만 되면 티브이도 안 보고 둘이 나가서는 밤하늘을 보면서 떠들다가 돌아오는데. 항상 책 갖고 둘이 이야기하고, 이것들은 무슨 예술가 연합인가. 암튼 너희들 존재감 장난 아니었어. 스스로를 잘 모르는구나?" 187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흔히 그러듯 나도 글을 쓰며 살고 싶단 생각을 해봤다. 수천 경기를 지켜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감독과 선수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내가 저들보다 나은 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프로가 되어 손바닥이 갈라질 때까지 스윙을 하며 공 하나에 죽고 사는 삶을 사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나는 결국 행복한 독자로 남기로 했다. 188
"넌 임마, 잘 있다가 제대해."
"병장님이나 잘 지내다가 제대하십시오. 저도 곧 따라갈 테니까."
"곧 좋아한다. 내년 오월이 올 것 같냐?" 19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99
삼월에 입대한 나는 군에서 맞는 첫 번째 식목일을 훈련소에서 보냈다. 모든 훈련병들이 나무를 심었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밖에서라면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겠지만 군대에서 눈이란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떻게 식목일에 눈이 내리느냐며 투덜댔다. 205
한참 웃다가 문득 건너편 객석에 있는 이지용을 봤다. 녀석은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한때는 어떤 일에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웃어야 할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우는 사람이 좋았다. 이지용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231
247
"재밌잖아. 남 이야기 하는 거만큼 재밌는 게 어딨냐?"
박제순이 씩 웃었다.
나는 박제순에게 관심이 생겼다. 처음엔 이 녀석이 왜 이 일에 가담했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녀석의 모든 것에 관심이 갔다. 박제순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어디서 자랐을까. 어떤 선생님을 만나고 어떤 친구들과 어울렸을까.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들으며 지냈을까. 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되었을까. 251
"시는 어떻게 했냐?"
"응? 아, 니 친구가 쓴 시?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렸지."
"하하하."
나는 웃었다. 너무 화가 나면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내가 웃자 박제순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우리는 같이 웃을 수가 없는 사이다. 녀석이 웃으면 내가 울고, 내가 웃으면 녀석이 울 것이다. 나는 웃으며 일어나 벤치 뒤편에 기대놓은 박제순의 목발을 잡았다.
"넌 봄을 맞이할 수 없어."
"뭐 하는 거야?"
녀석이 당황해서 나를 막으려 했지만 나는 목발을 들고 벤치에서 물러섰다.
"봄은 겨울을 견뎌낸 사람만 맞는 거야. 넌 이제부터 진짜 겨울을 맞게 될 거야."
"무슨 개소리야? 빨리 안 내놔?"252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인간에게 돌을 던지는 건 쉬운 일도, 옳은 일도 아니다.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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