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만 즐겨 읽는 여자인데.
트위터에서 하도 자주 마주친 책이라, 도서관에 꽂혀 있는 "울기 좋은 방"을 보자마자 괜히 반가운 마음에
이건 읽어야겠다, 싶어서 집어 든 에세이.
공감가는 글도 많고 참 괜찮았는데 왠지 모르게 읽기가 어려웠다.
속도도 붙지 않았고 자꾸 쉼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다시 펴기가 힘들었다.
이 책 한 권 읽는데, 한 2주 걸렸나보다.
1 동물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로망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으르렁거리고 싶을 때 으르렁거리고, 물어뜯고 싶을 때 물어뜯을 수 있고, 사랑할 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사랑하지 않을 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삶. 11
5 사람이 미우면 코와 귀가 발달한다. 미운 사람의 사소한 냄새에 얼굴이 찌푸려지고 그 냄새는 보잘것없는 것이 된다. 미운 사람이 밥을 먹을 때는 음식 씹는 소리도 싫어서 뒤통수를 한 대 치고 감옥에 들어가 벽을 보고 평생 앉아 있고 싶다. 그 사람이 밥을 먹으면 밥그릇을 잡아채고 싶다. 이쯤 되면 미움보다는 증오에 가깝겠지만 사람이 미우면 그 사람 옆에 있는 공기까지 순도를 잃는다. 사람이 미우면 그 사람 목구멍에 물 넘어가는 소리에도 소름이 돋는다. 미우면 서러워진다. 그 사람이 미운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변한 것을 알아채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26
9 상담선생님 말씀은 상대가 원하는 방법대로 사랑해야 하는데, 딸아이보다는 어머니가 원하는 방법으로만 사랑했으니 사과하라는 뜻이다. 나는 심리적 통찰력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한다. 심리적 통찰력은 타고나는 것인가? 교육받는 것인가? 어쨌든 나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부족한 사람이 어머니가 되어 귀한 생명을 우울하게 살게 했구나 하는 생각. 그런데 사람은 왜 부족하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부족한 사람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좋던데. 상대가 원하는 방법대로 사랑해야 하는 거구나. 내가 사랑하고 싶은 방법으로 사랑하며 살 수 없단 말인가. 46
10 사람이 사람을 귀찮아하면 안 된다. 결국 귀찮아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므로. 사람이 사람을 고마워하면 안 된다. 결국 고마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므로. 그 사람은 읽던 책이 많아 좀 보내주고 싶다고 글을 남겼다. 받은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싶었다. 주었다고 받는다면 받았다고 주어야 하는 것, 안 하고 산 지 오래되었을 때다. "그렇죠? 받았다고 나도 주려는 것은 좀 그렇군요. 잘 먹을게요." 49
12 "정말 나한테 관심 있나?"
"남자라면 준희를 좋아하겠지. 나도 준희가 좋은데. 그런데 아직 너무 젊잖아. 연애는 할머니가 되어서 해야 재미있어. 알았니?"
"그럼요. 우리 현성이 잘 키워야죠. 끝까지 현성이 엄마로 살 거예요. 그 남자 오늘은 안 왔으면 좋겠네." 63
15 잘 지내세요...... 라는 말. 명령 같기도 하고 당부 같기도 하고, 지구 건너편 얼룩 기린에게 보내는 아득한 안부 같은. 또 봐요...란 말 같기도 하고 보고 싶지만 참겠다는 말 같기도 하고 부디 잘 살라는 말 같기도 하다. 그냥 우리 언제 또 볼까요, 라고 하면 하늘과 땅이 뒤바뀌기라도 하나. 바뀌면 또 어떠한가? 잘 지내세요, 라는 말, 나는 아프다. 77
17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다면 헤어지는 일도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서로에게 거침없이 보여주고 살았다.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는 사랑하고 있었을 그 찰나가 바보처럼 순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상 외에 보이는 것이 없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 적이 있었다. 찰나였지만 그 찰나가 존재했었다는 기억으로 어떤 사람들의 관계는 지탱될 때가 있다. 86
18 '시 세 편만 읽고 밥을 하면 안 되나? 아니야, 빨리 밥을 지어놓고 읽자. 열 편을 읽어, 실컷!' 쌀을 열심히 씻는다. 힘차게 쌀을 씻으며 생각난다. '아, 오늘은 카푸치노 우유거품 수업하는 날이니까 5cm굽 구두를 신고 가야 해. 머리도 좀 감고 갈까. 인순님을 먼저 시켜볼까, 선미님을 먼저 시켜볼까.' 그러다가 늦은 밤까지 한 편도 못 읽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날 밤은 분한 마음에 잠을 뒤척인다. 89
19 중국에 오면 다 좋은데 음식이 힘들다. 사람 같다. 다 좋은데 많이 힘든 게 하나 있는 사람처럼. 그거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을 놓으려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다 놓는 게 좋은 일인 것 같다. 손바닥을 쫙 펴본다. 91
나는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있는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는 버릇이 있다. 계속 모서리를 접으며 읽는다. 92
잘 살아가는 일이 사랑하는 일임을 언약처럼 지켜내고 싶다. 너무 보고 싶으면 안 보고 살아도 괜찮다. 93
20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내 삶을 걸어가면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손 흔들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 우리 각자의 길을 잘 걷기로 하자. 나는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내 것을 포기하는 삶이 살아지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날 알았다. 그러니 서로에게 서로를 맡기는 일은 하지 말자. 너는 나고 나는 너이기도 함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 95
28 기억에 두고 싶은 페이지 모서리를 접어두는 버릇이 있는데, 산도르 마라이의 '결혼의 변화'는 폭풍처럼 접으며 읽었던 것 같다. 133
나는 술을 마시며 혼잣말처럼 "나는 헝가리 가고 싶은데" 한다. 술마시는 자리에서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데 그 말은 거기서만 진실일 때가 대부분이다. 나는 그런 사람 중 대표적 사람이다. 술 마시는 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그곳에서의 이야기로서만 존재한다. 나는 그 순간의 진실을 좋아한다. 단지 기억하지 않을 뿐이다. 135
"원하는 것이 자꾸 이루어져요. 무언가를 또 원하면 그것도 이루어지나요? 다음에는 꽃을 갖고 올게요. 왜 그렇게 글만 썼어요? 얼마나 힘들었나요?" 136
함께 있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137
32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랑은 없다. 156
36 아이리시 커피 Irish Coffee : 위스키가 들어간, 커피에 녹아든 위스키,
37 나는 불편한 사람과는 마주보고 앉지 않는 편이다. 불편한 사람이라는 표현보다는 공감하기 어려운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옆에 앉으면 이야기를 덜 할 수 있고 바라볼 일도 없기 때문에 그날도 잘 살펴서 적당히 앉는다. 눈빛조차 나누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열등감이 분출해서 마그마로 흘러내리는 순간이다. 뜨거운 내게 스스로 데일 때가 있다. 174
39 살아보니 책 읽은 것과 여행밖에 남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이 남는다고 하지만 가장 먼저 슬며시 사라지는 것이 사람이다. 그들은 멀리멀리 사라진다. 그들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나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였다. 참회하지 않는다. 내 곁을 그렇게 떠난 사람들을 기꺼이 잊고 사는 것으로 참회를 대신하기로 한다. 186
41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완벽하게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이다. 완벽하게 혼자임을 느끼는 상태는 혼자일 수 없다는 사실의 다른말이겠지만. 함께 있는 사람과 단 한 번도 온전히 섞여지지 않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섞여져 같은 강물로 흐르고 싶어서 미쳐나가던 적이 있었다. 그럴 수 없어서 그것이 되지 않아서 지금까지 걸어 다니며 쓸쓸함을 털어내려는 듯 여행하는가보다. 195
42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는데 거울 속으로 세탁기가 보였다. 세탁기 위 선반에는 세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사람에게 나는 섬유유연제가 어떤 것인지 유심히 보았다. 집에서 빨래를 할 때 똑같은 섬유유연제를 사서 넣고 빨래를 해보았다. 내 옷에서는 그 냄새가 나지 않았다. 먹는대로 정해지는 것이 향기라면 사는 대로 정해지는 것이 냄새인 것 같다. 200
47 "그 사람을 제게 주세요." 내가 아닌 것 같더라. 다른 사람인 것 같더라. 언제부터 그런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헤아리지 못하겠더라. 너무 놀라서 뜨거운 주전자를 던지듯 놓았다. 222
48 나는 수업 시간마다 항상 커피집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박이추 선생의 보헤미안은 1번이다. 228
일 년에 한 번씩 주문진 보헤미안에 간다. 슬며시 들어가 페루 오가닉을 시켜 바다를 보며 마시고 슬며시 돌아온다. 229
50 "나는 그 사람과 무슨 관계인가 궁금해져서 한동안 만나지 않았어."
준의 말에 내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해준다.
"명백한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거야." 239
호텔을 경영하게 되면 꼭 하고 싶은 커피 메뉴, 얼그레이 라떼 마키아토. 평소 하고 싶은 커피 메뉴를 잘 적어 쌓아둔다. 280
61 사람을 만나는 데는 삼 년과 이십 년이 고비인 것 같다. 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안 보게 되거나 그 삼 년을 거뜬히 넘기면 이십 년째 고비가 오는 것 같다. 평생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평생이란 말은 벌 같다. 그 사람과 나는 이제 이십 년을 향해간다. 앞으로도 나를 보고 웃지 않을 작정인가. 그랬으면 좋겠다. 노인이 되어서도 젊었을 때 품었던 마음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멋지다. 마음이 사람을 멋진 존재이게 할 때가 있다. 292
62 아침에 눈을 뜨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을 공책에 옮겨 써본다. 볼펜으로 꼭꼭 눌러 쓰며 기도한다. 나도 이런 문장을 발명하고 발견하게 해달라고. 피부 안으로 스미어 다른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295
혼자 커피를 만드는 시간, 혼자 책을 읽는 시간,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없으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 시간에서 만들어지는 힘으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곧 다시 돌아와 혼자 있어야 한다. 297
그러므로 나의 커피도 목적이 없다. 목적 없이 커피 만드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행복해서 미칠 지경인지, 나만 안다고 생각하는 웃기는 착각에 스스로 기쁘다. 그런 날, 커피가 잘된다. 손목이 내 손목이 아닌 것 같다. 나를 창고에 처넣고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잠궈주었으면 좋겠다. 커피만 만들면서 뒹구르게. 갓난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만들었다. 297
64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이해해. 네가 내려주는 커피가 나에게는 모두 맛있는 것처럼.. 그 선생님도 혼자 이겨내겠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뭔가 통하려면 혼자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 꼭 있잖아. 그런데 말이야, 그런 모습들이 다 과정이지. 너도 알잖아?" 307
지인이 가고 누워서 낮잠을 자다 눈을 뜬다. 코끝 인중에는 숨쉴 때마다 오전에 마셨던 커피 냄새가 산책을 하듯 났다 안 났다 한다. 무엇이었다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한 것처럼. 308
66 우리 경희씨는 미술을 전공했다. 손으로 하는 것은 다 잘한다. 우리 경희씨가 손으로 하는 것을 나는 따라할 수 없고 따라해볼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사실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고,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318
늘 하는 생각이지만, 나는 이렇게 한 그릇의 밥이나 한잔의 커피로 마음을 보여주는 일에 몰입하며 살아갈 것이다. 321
69 만나면 으르렁거리면서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좋은데 멀리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미워도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336
70 커피는 800가지 이상의 향기를 갖고 있고 분쇄할 때의 향기, 물과 만났을 때의 향기, 입안에서의 향기 그리고 다 마신 후의 향기가 각각 다르다. 사람의 향기도 만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대상과 만났을 때만 발현된다. 일방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 상호적이다. 342
73 나는 사람에게 잘 사로잡히지 않지만 사로잡히면 맹목적으로 사로잡힌다. 산도르 마라이의 문체에 사로잡혔고, 존 버거의 'A가 X에게'에 사로잡혔고, 부처님께 사로잡혔다. 359
당신, 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당신, 이란 말은 꽃 같다. 나는 당신, 이라는 말에 오랫동안 몰입해왔다. 359
이 세상은 해주고 후회하는 것이 맞다. 다 주고 싶었는데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주지 못했다. 361
74 한 사람에 대해서 한 가지 감정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잘 정리하거나 잘 누릴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367
76 이번 달만 잘 지내면 좀 수월해지겠지 하는 생각도 이제는 아예 하지 않고, 이 상태에서 잘 지내보는 것이 최선이고 최상이라고 여기며, 걸음도 단단히 걷는다. 381
며칠 전 개강하는 날에는 수업 도중 혼자 엉엉 울던 사람이 있었다. 왜 우는지 알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을 놓지 않으면 된다. 놓으면 두 번의 생을 살아야 하더라... 그래서 그냥 두었다. 383
간호 일과 커피 일 중 무엇을 해야 하나 물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했다. 이 세상과 이별하는 순간, 안 해서 후회할 것 같은 일을 하라고 말했다.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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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것]
김종삼 시인 '북치는 소년'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
산도르 마라이의 '결혼의 변화'
존 버거의 'A가 X에게'
[마실 것]
얼그레이 라떼 마키아토 Earl Grey Latte Macchiato
아이리시 커피 Irish Coffee
[갈 곳]
주문진 박이추 선생의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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