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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시

시 읽기


시를 알면 세상이 시로 보인다는 글귀(노래 대신 시를 외워보니/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동아일보/2013.2.21)를 마주쳤다. 윤세영은 이어 "봄눈이 내리면 유금옥 시인의 '춘설'이, 동백을 보면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가 저절로 떠올라 맑고 겸허해진다."라고 적었다. 나는 기형도 시인의 '밤 눈'이라는 시가 떠올라 그녀의 문장에 격하게 공감했다. 


작년 쯤, 한 친구가 시를 외울테니 확인해달라며 내게 시집을 건넸다. 친구가 허공을 바라보며 한줄 한줄 낭송하길래, 나도 모르게 따라 외웠던 바로 그 시. 지금은 또 까먹었지만, 한 때나마 내가 외웠던 유일한 시 한 편. 아직 세상이 시로 보일 만큼은 아니지만,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주 가끔 이 시가 떠오른다.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 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기형도, 밤 눈)




이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면, 나는 아마 바람, 옷, 춤, 사시나무 그림자 등 문장 문장마다 줄을 긋고 형광색으로 칠을 하며 숨어있는 함축적 의미를 받아 적었을 것이다. 사실은 지금도 그 때의 시 읽기 습관이 남아, 누군가가 "이 부분은 이런 의미야. 이 단어는 이런 속 뜻을 함축하고 있지."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한줄 한줄 해석하며 읽는 것이 어렸을 적 배운 '시 읽기'니까. 


그렇지만 온전히 느낌으로만 기억하는 시 읽기도 참 괜찮은 것 같다. 그리고 여러 문장 중 딱 한 문장에만, 혹은 딱 하나의 단어에만 매료되는 것도 역시 괜찮은 시 읽기 같다. '밤 눈'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이 몇 개 있다. 눈의 결정체를 '은실'이 엉켜 있다고 표현한 것, 쌓인 눈 사이로 나뭇가지가 보이는 것을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있다'고 표현한 부분, 그리고 눈이 내려오다 바람이 불어 자꾸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너의 춤'이라고 표현한 것도. 


무엇보다 이 시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편지를 쓰는 듯한 느낌이 들어 참 좋다. 그래서 외우기에 더없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