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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홍희정, 문학동네


예전에 서점 구경 갔을 때, 신간 코너인가 인기 소설코너인가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던 책.

제목이 하도 애타면서 소심하고 감정이입이 되길래, 읽고 싶었던 책이다.

게다가 제 18회 문학동네 작가상수상작이라니! 굉장히 따끈따끈한 "괜찮은" 소설임을 인증!


*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주인공: 율이(남자,26), 이레(여자,26), 율이 어머니, 이레 할머니, 칸트, 율이 여자친구 등..


율이를 좋아하는 이레.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말하면 다시는 못보게 될까봐 그럴 바엔 힘들어도 이렇게 지내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레.

어찌가 감정이입이 되던지.

어렸을 적 짝사랑만 줄기차게 해오던 나에게는 '공감 100퍼센트'의 이야기였다. 과거가 몽글몽글... 떠올랐다.


스물여섯이라는 나이답게(?), 이들은 딱, 취준생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은 각자 아르바이트를 한다. 율이는 마트에서, 이레는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곳에서.

그런데 그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회사가 참 인상적이었다.

밤늦게 고객 명단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면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지나친 관심과 참견은 금물. "적당한" 주의와 관심이 키포인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네,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런 식으로.

밤늦게 일하는 점 빼고는, 참 내가 해도 잘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물론 현실에는 없지만. (있나?)


읽으면서, 나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건지 생각했다. 

그리고 시시콜콜한 나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저자
홍희정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10-0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 사람이 웃어주는 것만으로 우주의 모든 애정을 받는 것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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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갈피.


_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몇 살을 먹어도 좋은 법이야. 26


_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들어주는 일을 계속 할수록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곤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해야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것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고 싶었다. 하루 분량의 들어주는 일이 끝나는 늦은 새벽이 되면 나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누군가와 이야기하고픈 마음을 꾹꾹 억누르곤 했다. 97


_ 여행을 통해 내가 깨달은 건, 머무를 곳에서 장점을 찾고 떠날 곳에서 단점을 찾는 게 나라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101


_ 칸트가 사람들의 방에 그림을 그려주게 된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왔다고 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좋아해서 자신의 방 벽 전체에 호퍼의 그림을 모사한 뒤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렸는데 지인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둘 의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날씬한 몸매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거식과 폭식을 반복하던 모델 친구는 자신의 방에 도넛가게를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칸트는 가구와 살림살이를 모두 치운 방 벽에 갓 나온 도넛들이 가득 진열된 도넛가게를 그려주었다. 알코올중독이었던 친구 하나는 방안에 양조장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하고, 당뇨병을 앓는 친구는 베스킨라빈스 매장을 그려달라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은 채 말굽을 잔뜩 그려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105


- 참으로 오랜만이었지.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편안하게 구덩이 얘기를 한 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렇게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감하고 오해하고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무엇보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좋았어. 초승달을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랄까. 구름이 스르르 비켜나면서 살며시 드러나듯 애틋하게 빛나는 미소 말이야. 그래서 얘기했지.

- 뭐라고요?

-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달라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 달 가까이 구덩이 얘기만 반복하던 고객이 아니었던가.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음이 통하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그가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싶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 정말이지 적절한 부탁을 했네요. 127


_ 나는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나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버렸다는 후회와 드디어 털어놨다는 시원함이 뒤섞였다. 아프고 기뻤다. 묘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인지도 몰랐다. 고객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문득 <들어주는 사람>의 고객들이 떠올랐다. 131


- 율이는 아직 연락 없니?

나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 전화 오면, 마구 욕해줄 거야.

존재의 숙명을 안고 사라져버릴 할머니와 연락이 되지 않는 율이. 외톨이처럼 쓸쓸했다. 꾹꾹 눌렀던 감정이 새어나왔다. 눈가가 축축이 젖었다. 할머니가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마음껏 누려야 돼. 135


- 율아.

- 응.

율이는 항상 대답을 잘했다. 마치 누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그 말을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마치 율이와 마주보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벅차게 오르내렸다. 따스하고 농밀한 무언가가 몸속에서 출렁거렸다. 오랫동안 율이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율이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아니,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할머니에게 쪽지를 썼다.


_ 할머니, 나 여행 가. 정확하게 말하면 율이를 만나러.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마음껏 누리러.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