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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나의 토익 만점 수기] 심재천,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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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난 이렇게 반응했다.

도서관에 가서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며 책 제목을 훑어보는데, 이 제목이 딱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 없는,

심지어 제 3회 중앙장편 문학상 수상작이기까지 한! 듀듕!


지금까지 나의 책 고르는 기준은, 

1.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거나 (그러나 좋아하는 작가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 기준은 이미 오래 전에 쓸모를 잃었다;)

2. 좋아하는 출판사의 작품이거나 (이 기준의 문제점은, 도서관에서는 딱 '출판사'명이 적혀 있는 부분에 라벨이 붙어있다는 것;)

3. 문학상 수상작인 것.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책이 딱 나의 세 번째 요건에 맞아 떨어지므로 당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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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일하게, 내가 지하철에서 자신있게 펼쳐 읽을 수 없었던. 책이다.

소설만 읽는 나로서는 누가 봐도 소설로 보이는 이 책이, 

남들에게는 누가 봐도 진짜 '토익 만점 수기'로 보인다는 것을 책을 반쯤 읽은 후에야 알았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

저자
심재천 지음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 2012-01-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너도나도 토익 점수에 목숨 거는 이 땅의 딱한 현실을 시종일관 ...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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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펼쳐지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다.

말도 안되는데, 참 희한하게 애정이 가는 이야기.

"이건 내 얘기야" 라고 공감할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공감대가 형성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희한한 이야기.

탁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이야기"라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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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난 주인공이 마약상의 인질이 되거나, 

낫으로 바나나를 수확하던 중 그 집의 푸들을 죽이게 되고,

'아폴로13호교'라는 희한한 종교를 믿는 외국인(요코)이 '평양식 물냉면'을 먹고 있다거나,

인질로서의 의미를 다하기 위해 경찰로부터 요코를 구하려다가 한 쪽 눈을 잃게 되는 등의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이야기 속에서, 그래도 개인적으로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두 군데 있었다.


 


1] 어학연수 도중, 토익 성우를 만나게 된다


"바나나를 좀 구경하고 있었어요."

내가 둘러댔다. 쌍안경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덤불 속에서 갑자기 일어나자 현기증이 났다.

"바나나라면 얼마든지 있지요."

여자가 말했다.

바나나라면 얼마든지 있지요.

바나나라면 얼마든지 있지요.

머릿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내 귀에 콱 박혔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둘째치고라고, 발음이 비범했다. 평범한 산골 아낙의 발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농장으로 안내했다. 통나무집 앞에서 푸들이 컹 짖었다.


"여보, 이 분이 바나나를 사고 싶다는군요."

여자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환영합니다."

하와이안 셔츠가 말했다.

이럴 수가.

남자의 발음도 평범한 산골 농사꾼의 발음이 아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건 확실하다. 어디서였을까. 공항 안내방송인가. 영화 예고편 목소리인가.

"여보, 이분은 몇 개의 바나나를 원하는 겁니끼?

남자가 아내에게 확인한다.

흠잡을 데 없는 영어.

그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 마누라와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데도 말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문법을 철저히 준수한다. 시제 무시? be 동사 생략? 있을 수 없다. 

"저는 이분으로부터 두 송이라고 들었어요."

여자가 대꾸했다. 그녀의 말투도 10점 만점에 10점.

나는 눈을 감고 부부의 대화를 분석했다. 그들의 발음은 정확하고 깔끔하다. 문어제 영어를 쓰며 문법을 완벽하게 따른다. 단 한 순간도 표준 영어를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

그래, 맞다. 대본. 이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녹음해서 토익 리스팅 테스트로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바로 그거다.

토익 리스닝 테스트.

이제야 이들의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났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토익시험장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목소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내에 오답을 유도한 그 목소리.

그들이었다.

그들은 토익 성우였다. 141



2] 호주에서 1년 간 주인공 '나름'의 방법으로 어학연수를 마친 뒤에 한국에 들어와 보는 첫 토익시험에서,

토익시험문제를 풀면서 "토익 문제 출제위원이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부분.


"마이클. 21번 문제는 신선할걸. 보이 '(b) 화면을 터치하세요'가 인상적이네. 스마트폰 유행을 잘 반영했어. 하지만, 정답은 (c)로군."

내가 말했다.

"하하. 눈치 챘나. 응시자 중 70퍼센트는 틀리도록 만들어봤네." 


"198번의 '(a) 생일축하 카드'는 일종의 농담이로군. 너무 엉뚱해. 정답은 '(d) 개인용 달력' 인데."

"그런 농담도 없으면 따분해서 말이야."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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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상의 나래 부분은, 주인공이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시험을 봤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지.

그런데, 그래서, 결국 주인공은 토익 990점을 맞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