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틀 시카고 주인공: 선희, 선희 아빠, 미카, 미세스 정, 잭슨 할아버지, 양복점 할아버지, 세라, 타샤, 필리피나, 줄리 아줌마 등.
# 이 책에 대한 사전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다", "재미있다" 등의 간단한 리뷰조차 들어본 적 없는 백지상태였다.
다만, 문학동네라는 것. 그리고 '정한아'라는 약간 익숙한 이름. 그 두가지가 이 책을 선택하게 했다.
문학동네만 그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학동네 수상작 책 뒷편을 보면 가끔 "수상작가 인터뷰"를 실려있는데,
어떤 수상작가를 '정한아'가 인터뷰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녀의 책도 아니고, 2장도 안 되는 인터뷰 하나로 그 이름이 뇌리에 박혔던가 보다.
# 딱 첫느낌. 그 느낌을 김윤식 문학평론가가 써두셨길래, 그대로 인용하려고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작품 전체에 청량감이 떠도는 것도 남다른 자질이다."
분명 무거운 주제인데, 작중 화자가 열 두살 난 '선희'인 덕분인지, 조금은 가볍게 그려질 수 있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가슴 속에 어두움도 함께 자라나는 것 같다.
선희는 열 두살 소녀였기 때문에, 어두움의 깊이가 어른의 그것보다는 낮았는가 보다.
만약 선희의 아빠가 작중 화자였다면. 느낌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 읽으면서 자꾸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가 떠올랐다. 물론 진희보다는 선희가 좀더 밝다.
#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 어디일까, 읽으면서 정말 궁금했다. 검색해보니, 미군 기지가 있는 경기도 동두천이라고 한다.
기지촌은? 병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을 형성하는 군사취락이라고 하고.
# 유난히 이 책은, 접은 페이지가 많았다. 접은 이유는 제각각.
그런데 이걸 다 인용해도 되나? 저작권 위반인가? 우선 옮겨보기로.
_ 나는 종종 혼자 걸어서 숲으로 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애들이 자다 깨어 '엄마!'하듯이,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하듯이, 또 심심해서 '엄마!' 하듯이, 나에게도 삶의 순간순간 빈칸을 메울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28)
_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그 이야기를 손안에 꽉 쥐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손끝에서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곳에 의미들이 매달렸다. (50)
_ 여기 길을 내서는 안 된다.
순간 날카로운 것에 질린 것처럼 아프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이곳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이 땅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이 땅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 이 위에 자동차들이 달려다니는 길을 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때, 내가 심은 장미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무덤 사이에 핀 노란색 장미꽃.
언젠가 잭슨 할아버지가 미카와 내게 들려준 꿈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처음 제이제이 존슨의 트롬본 연주를 들었을 때 말이다. 명치끝이 아파서 며칠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거든." 할아버지는 그때를 떠올리듯 미소지었다. "꿈에 대해 물을 건 하나뿐이란다." 잭슨 할아버지는 미카의 가슴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것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하는가. 얼마나 많이, 아프게 하는가." (107)
_ "아저씨 꿈은 뭔데요?"
그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좋은 프로그램 만드는 거. 지금은, 이 골목 다큐를 잘 만드는 게 내 꿈이지."
"그럼... 아저씨는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아는 할아버지가 그랬거든요. 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 (152)
_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미카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을 깨기 위해 방귀라도 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때, 미카가 뒤로 돌아 달려갔다. (131)
_ "네 아버지는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고, 고집도 세지만, 적어도 비겁한 사람은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한테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단다. 나는 아직까지 그러지 못했어.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173)
_ "선희는 남자친구 몇 명이나 사귀어봤니?"
'남자친구 없어요.'
"아하, 그때 그 모자 쓴 남자애 한 명뿐이구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카는 남자친구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그애만 쳐다보던데."
'그건 그냥 짜증나서 본 거라고요.'
"왜 짜증이 나?"
'애가 바보 같고 미련해서요.' (188: 미카가 소년이었다는 것을 소설 후반부에서야 알게 되었다... 듀듕)
_ "같이 가줘서 고마워."
아줌마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가끔은 어른들도 의지할 데를 찾아 아이들의 손을 잡는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아빠의 손길을 뿌리쳤을 때, 그 커다란 몸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휘청거렸던 것도 기억한다. (194)
_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그곳에 있었어. 간호사가 갓 태어난 너를 잠시 네 엄마한테 안겨줬어. 정말 자그맣고, 새빨간 아기였지. 울기는 또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네 엄마가 네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하니까 신기하게도 넌 울음을 멈추고, 네 엄마와 눈을 맞추었지.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 하지만 세상엔 찰나로도 이미 충분한 순간이 있단다. 간호사는 다시 너를 데리고 갔고, 네 엄마는 한참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어. 나는 화장실에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지. 돌아왔을 때, 네 엄마는 사라지고 없었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212)
_ 미세스 정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내더니 미소를 지었다. 고요한 가운데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빠와 미세스 정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뭔가를 이해한 것 같았다. 모닥불을 사이에 둔 짧은 순간이었지만, 세상에는 찰나로도 충분한 순간이 있는 법이다. (227)
_ "몇 년 안에 꽃이 안 피면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지."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잖아요."
"가능성은 늘 반반이야."
미세스 정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늘 시도해왔잖아." (217)
_ "아빠... 만약에 다시 사랑하는 분이 생기면... 다시 사랑을 하셔도 돼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아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아니에요, 아빠."
나는 말했다.
"가능성은 늘 반반이에요." (228)
_ "이제 그만둬."
"뭘 그만두라는 거야?"
미카는 시퍼런 눈두덩을 꿈벅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트롬본 찾겠다고 헛고생하지 말라고! 패거리들이 그렇게 순순히 넘겨줄 거 같아? 그럴 시간 있으면 잭슨 할아버지랑 좀더 같이 있겠다."
"내가 알아서 할게."
미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트롬본 꼭 돌려받을 거야. 이번에도 도중에 그만두면 나는 남자도 아니야."
"뭐, 남자?"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미카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215)
_ 미카는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계단 꼭대기에 앉아 느긋하게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그애는 나를 보자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오더니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다가, 입을 맞췄다.
골목에서 살아온 십이 년 동안, 나는 적어도 천 번 이상의 키스를 목격해왔다. 기뻐서 하는 키스, 슬퍼서 하는 키스, 밥 먹기 전에 하는 키스, 안부를 묻는 키스, 위로해주려고 하는 키스, 헤어지기 전에 하는 키스, 미안해서 하는 키스, ... 키스의 모든 분야에서 조기교육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실제에서 그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입술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에 나는 너무 놀라서 계단에서 떨어질 뻔했다. 휘청거리는 내 허리를 붙잡은 미카는 이리저리 입술을 포개다가, 어쩔 줄 모르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키스는 사실은 하나의 키스, 사랑을 구하는 키스인지도 모른다. 미카는 내 뺨에 자신의 뺨을 가만히 갖다댔다. 미카의 가방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트롬본이 보였다. 입속에서 콜라 맛이 났다.
잭슨 할아버지는 의식이 희미한 중에도 자신의 트롬본을 한눈에 알아봤다. 트롬본을 받아든 할아버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찌그러진 부분을 쓰다듬었다. 트롬본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 트롬본은 잭슨 할아버지의 유일한 끈이었다. 잭슨 할아버지의 가족, 꿈, 하나뿐인 애인이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결국에는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218: 눈물이 그렁그렁.. 눈가에 매달려 대롱대롱했던.)
_ 나는 내가 그릴 수 있는 제일 큰 호를 그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미카는 공항으로, 미국으로, 흑인들이 모여 사는 뉴올리언스의 트레일러 촌으로 멀어져갔다. 미카는 내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런 약속이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마저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미카의 말을 믿었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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