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에 출간된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러한 그의 삶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책으로 행동과 명상, 정신과 물질의 대립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인 동시에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카잔차키스는 1917년 펠로폰네소스에서 실존 인물인 기오르고스 조르바와 함께 탄광 사업을 했고 그와 어울렸던 그 경험을 책으로 엮었던 것이다. (중략) 생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고 일견 방탕해 보이면서 또 한 편으로는 순수함이 남아 있는 조르바는 니체가 말했던 '초인'의 이미지와 카잔차키스가 평생을 찾아 헤맸던 '인간을 속박하지 않는 지상의 신'에 가깝다. '오늘을 즐겨라(카르페 디엠 carpe diem)'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인물인 조르바는 삶에서 얻은 철학으로 책상물림인 주인공을 깨우치는 스승이자 벗이자 아버지이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남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작품 해설 중
책과의 인연에도 분명 때가 있는 것 같다.
예전 《코끼리는 안녕,》이라는 책도 처음엔 안 읽혀서 버려두다시피 했는데 나중에 그 언젠가 너무나도 잘 읽혔던 것처럼
최근 읽은 《달과 6펜스》와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왜 이 책을 포기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술술 읽혔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스무살 무렵에 읽었다는 친구 말을 듣고
아, 나도 그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했지만, 지금이라도 조르바를 만난 것이 어딘가 싶다.
지금 읽고 있는 김영하의 《읽다》에서 '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가 고전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과 일치하는 대목이 나와서
전혀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더 신기했던 건, 우연히 동네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보게 된 '인문학 강연회'
3월의 주제가 바로, "인간, 자유를 향한 끝없는 모험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두둥!
이런 게 연계 독서, 인가
읽기의 확장, 이라고도 하던가
▼ 철산도서관 인문학 강연회 포스터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조금씩 멀어진다는 건 얼마나 쓰라린 일인지! 깨끗이 헤어지고 나서 아픈 가슴을 달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을.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본 모습이니까. /9
나는 주머니에서 내 여행의 동반자인 단테 문고판을 꺼내 들었다.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벽에 기대어 편하게 앉았다. 어느 부분을 읽을지 한순간 망설였다. <지옥편>의 불타오르는 암흑을 읽어? <연옥편>의 정화하는 불길을 읽을까? 아니면 인간의 희망이 최고의 감정 기준이 되는 대목? 나는 마지막을 골랐다. 아침 일찍 고르는 단테의 시구가 하루종일 그 운율을 선물해 줄 거라는 생각에 문고판 단테를 손에 들고 자유를 만끽했다. /15
"날 데려가시겠소?"
나는 그를 주의 깊게 뜯어보았다. 그는 움푹 들어간 뺨과 강인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회색 곱슬머리에 밝고 날카로운 눈동자를 가졌다.
"왜요? 함께 뭘 할 수 있을까요?"
"왜! 왜!"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소리치고는 덧붙였다.
"'왜'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시오?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된답니까? 자, 날 데려가시오. 요리사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들어 보지도 못하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수프를 만들 줄 아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협박하는 듯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가 일단 마음에 들었다. 수프 이야기도 마음에 들었다. 멀고 쓸쓸한 해안으로 헌털뱅이 같은 친구를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수프를 얻어먹고 이야기만 듣는다고 해도... 그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뱃사람, 신드바드 같은 인물인 것 같았다. 마음에 들었다. /17
"… 산투르를 연주하게 될 줄 알면서부터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안 좋거나 돈이 한 푼도 없을 때에는 산투르를 켭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켤 때 당신이 말을 거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나는 들리지 않아요. 들린다 해도 대답은 못 해요. 말을 듣거나 대답을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요."
"그건 왜요?"
"그걸 모른단 말이오? 그게 바로 정열이라는 거요." /20
나는 이제야 알았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어도 만나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과 푸짐한 말을 쏟아내는 커다란 입과 위대한 야성의 정신을 가진 사람. 모태인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채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 21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좀 다른 문제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하지요. (중략) 그렇지만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두겠소. 마음이 내켜야 하오. 이점은 확실하게 해 둡시다. 만일 당신이 나한테 연주를 강요하면 그 땐 끝장이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라 이 말이오."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유라는 거요." /23
크레타의 시골 풍경은 생각을 다듬은 구성, 군더더기 수식어가 없는 은근한 문장, 최대한 절제하여 표현한, 잘 쓴 산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박한 것도, 인위적인 구석도 없다. 표현해야 할 것은 위엄 있게, 엄격한 행간에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감성과 애정이 풍겨 나왔다. 공기 중에 레몬 나무와 오렌지 나무가 흘리는 향기가 진동했고, 넓은 바다는 끝없는 시구가 흘러넘쳤다.
"크레타..."
나는 나직이 불러보았다.
"크레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46
부처에서 벗아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책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벗어나도록 할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 부딪히고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아직 많이 늦은 건 아닐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76
갑작스레 찾아온 생각들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언어에 붙잡혀 타락한 것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88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행복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흘러간 뒤에야 그것을 돌아보면서 극서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걸 실감했다. /89
I was happy, I knew that. While experiencing happiness, we have difficulty in being conscious of it. Only when the happiness is past and we look back on it do we suddenly realize - sometimes with astonishment - how happy we had been. But on this Cretan coast I was experiencing happiness and knew I was happy.
우리는 밤늦게까지 불 옆에 앉아 있었다. 행복이라는 건 포도주 한 잔, 밤 한 톨, 허름한 화덕과 바닷소리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이 전부였다. /107
부드럽게 비가 내릴 때 그 비가 내 안의 슬픔을 건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이면서도 즐거운지! /119
왜 이런 걸 쓰고 있는지 알겠나? 함께 지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일세.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감정을 숨기는 버릇이 있어서 그때 밝히지 못했던 생각을 지금 이렇게 밝혀 두려는 것일세. /123
"보스, 돌이나 비, 꽃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릴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걸지도 몰라요. 보스, 언제쯤이면 우리 귀가 열릴까요? 언제쯤이면 우리가 두 팔을 벌려 돌이나 비, 꽃, 사람들 같은 모든 만물을 안을 수 있을까요? 보스,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서는 뭐라고 그럽디까?" /124
진정한 행복이란 게 이런 걸까. 별다른 야망 없이 세상의 야망을 다 품은 듯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졌지만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음식을 실컷 먹고 마신 다음에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을 머리에 인 채 바다를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가 이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기적 같은 일이 진정 행복 아닐까. /157
당신이 내 생각이나 내 약점이나 내 헛소릴 실컷 비웃어도 좋아요. 이 세 가지가 도대체 뭐가 다른 건지도 모르겠네요. 세상엔 웃음이 흔하기도 합니다. 웃는다고 생각하니 우스워지네요. 사람에겐 바보같은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가장 큰 바보는 그런 바보짓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칸디아에서 얼마나 바보짓을 하고 있는지 아셨을 겁니다. 보스, 그 얘기를 차근차근해 드릴게요. 조언이 필요하거든요. 당신은 아직 젊지만 책을 많이 읽어서, 이렇게 얘길 하면 실례겠지만, 약간 구식이에요. 그런 당신의 조언이 필요한 겁니다. /193
물 속에 잠긴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한 날씨였다. 산에 오를수록 정신이 맑아지고 고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맑은 공기와 부드러운 호흡, 광활한 지평선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았다. 살아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허파와 콧구멍이 있어서 산소가 필요하니 먼지와 안개 속에서는 호흡이 불편해지겠구나 생각했다.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공기 속에 꿀 냄새가 섞였고 머리 위를 지나는 바람은 바다처럼 한숨을 쉬었다. /243 (번역자에게 감탄)
The day shone like a diamond of the first water. The higher we went, the more our spirits seemed to become purged and exalted. Once again I felt the influence on the soul of pure air, easy breathing and a vast horizon. Anyone would think the soul, too, was an animal with lungs and nostrils, and that it needed oxygen, was stifled in the dust or in the midst of too much stale breath.
The sun was already high when we entered the pine forest. The air there smelled of honey, the wind was blowing above us and soughed like the sea.
"보스, 우스워도 웃지 마시오. 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라는 겁니다. 내 말 잘 들어 둬요. 토할 만큼 처넣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254
"네, 당신은 그 잘난 머리로 다 알아듣죠. 아마도 이럴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틀렸어.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지. 그 사람은 잘하는 짓이야, 저놈은 저러면 안되지.' 그래서요?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내가 보는 건 당신 팔과 가슴이에요. 팔과 가슴이 뭘 하느냐고요? 그저 침묵하죠. 일절 말을 안 합니다. 마치 피 한 방울 통하지 앟는 것 같다 그 말입니다. 그래, 도대체 뭘로 이해한다는거요? 머리? 이거 왜 이래요!" /289
요새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나쁜 놈이구나. 이렇게 구분합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별 상관 안 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이게 더 문제거든요. 마지막으로 내 압에 쑤셔 넣을 빵에다 두고 맹세합니다만,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을 거에요. (후략)" /293
"보스, 만물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겁니까? 누가 이들을 창조한 거지요? 무엇보다도..."
조르바의 목소리가 분노와 공포로 떨렸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왜 죽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나는 대답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가장 단순하고 본질적인 질문을 받았는데 그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모른다고요?"
조르바의 둥근 눈이 놀라움으로 더 커졌다. 내가 춤출 줄 모른다고 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보스, 당신은 그 많은 책을 읽었잖아요.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읽는 거요? 왜 읽습니까?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없는데 도대체 뭐가 있다는 겁니까?"
"책에는 인간의 혼란이 있어요. 조르바, 인간의 혼란으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요."
"혼란이오? 흥!"
(중략)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건지, 어디 그 얘기 좀 해 보세요. 요 몇 년 동안 당신이 청춘을 불사르며 읽어 온 책에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여 있었겠죠? 모르긴 해도 종이 오십 톤은 씹어 먹었을텐데. 그래서 뭘 얻으셨나이까?"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니다. 보다 위대하고 좀 더 영웅적이며 더 절망적인 그것은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대답하기 어렵습니까?"
조르바가 다그쳤다. 나는 그에게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346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이 필요한 법입니다. 나는 어제 일어났던 일 따위는 다시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도 미리 생각하지 않지요. 내게 중요한 건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조르바, 지금 이 순간 자네는 뭘 하나?' '잠자고 있어.' '그래,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뭐 하나?' '여자한테 키스하고 있지.' '그래, 그럼 실컷 해 보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 없으니 실컷 키스나 하게.'" /350
나는 꺼져 가는 불가에 앉아 조르바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데다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런 말들은 따뜻한 인간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은 모두 종이로 만든 것이었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는데 말에 어떤 가치를 따질 때는 그 말이 핏방울을 품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58
"보스!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아요. 당신만큼 사랑해 본 사람이 없었다오.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는데 내 혀로는 부족해요. 춤으로 보여 드리지. 자, 갑시다!" /373 왜 눈물이.
겉으로는 완전한 패배인데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의 파멸이 비할 데 없는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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