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해럴드 블룸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쓰기 전에는 햄릿 같은 인간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썼다. 그런 식이라면 아마도 나라는 인간은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와 라스콜니코프 같은 인물로부터 창조되었을 것이다. 상상 속에서 창조되었으나 현존하는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이후로도 영원히 살아남을 그 인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작가의 말에서
사실은 『렉싱턴의 유령』보다 먼저 읽었고, 먼저 포스팅을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더 늦어버린 것은, 이 책에 대해 너무 할 말이 많았기 때문. 너무 할 말이 많아서 한 사흘 쯤 미루다가 할 말을 조금 잊었고 (ㅋㅋ) 이러면 영영 공개하기 어려워지겠다 싶어서 그냥 대충 써야겠다, 하며 마음 비우고 적어내려가는, 현재 시각 새벽 12시 32분.
이 책은 얼핏 보면, 누군가 "왜 소설을 읽느냐"고 물었는데 대답하기 곤란한 때 추천해줄 수 있을 법한 책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실제로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읽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너무 소설만 읽는 편식 독서를 하면서도 누군가 왜 소설을 읽냐고 물으면 선뜻 자신있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나처럼, 소설이 좋아 죽겠는데 왜 좋은건지 이유를 찾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음 사실 『읽다』를 읽고 생각해낸 것은 아니지만, 소설이 왜 좋은지에 대한 고민을 여러번 하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른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소설 속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주변의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적 소모가 줄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인물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책에 나오는 구절인데,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러니까 동의하지는 않고 또 내가 그 사람과 함께 할 순 없지만, 아, 너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구나 하며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 또 한 가지, 소설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소설 속 수많은 인물들, 그들에게 내재된 모순들을 보면서 내게서도 수많은 모순 덩어리들을 보게 되고, 아, 내가 이렇게 모순된 사람이고, 부족한 사람이고, 이렇게나 많은 단점들이 있구나, 하며 나를 조금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타인에게서 보게 되는 모순들 역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고 할까.
『읽다』를 읽기 전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책들 ▼
특히 『돈키호테』(세르반테스), 『마담 보바리』(플로베르), 『죄와 벌』(도요토옙스키),『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오디세이아』(호메로스),『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 『일리아스』(호메로스), 『성』(프란츠 카프카), 『이방인』(알베르 카뮈), 『파리대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안나 카레니나』, 『리어 왕』, 『눈먼 자들의 도시』, 『페스트』, 『소송』
『읽다』를 읽고 보고싶어진 미국 드라마 ▼
<빅뱅 이론> <소프라노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김영하의 소설을 읽고나서 『읽다』를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
『빛의 제국』, 『살인자의 기억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흡혈귀」, 「오빠가 돌아왔다」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그러니까 고전이란 처음 읽으면서도 '다시' 읽는다고 '변명'을 하게 되는 책이지만, 처음 읽는데도 어쩐지 '다시'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오디세이아』의 완역본을 마흔이 넘어서야 읽었지만 그전에도 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략) 저와 같은 독자들을 위해 이탈로 칼비노는 이런 정의도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책이다." /12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31
"현대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냐. 나는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는 데 귀중한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아. 인생은 짧으니까." /44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대화 중)
"소설이든 영화든 끝까지 봐야 온전한 반응이 나올 수 있는데, 소설은 영화와 달리 끝까지 보는 경우가 드물고, 일단 끝까지 보았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어떤 면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등장인물을 이해하고 그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떤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면 거기엔 무엇이든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소한의 것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실망스러웠다면 바로 던져버리고 그 작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입을 다물었을 겁니다. (후략)"
책이 충분히 재밌지 않으면 우리는 책장을 덮고 책을 그만 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도 됩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영화는 상영 도중에 일어나서 나가려면 눈치가 보이지만 책은 혼자 읽는 것이어서 잠깐 책장을 덮는다고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매 순간, 우리는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읽겠다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해서 한 권의 책을 끝내게 됩니다. 완독이라는 것은 실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만 읽고 싶다는 유혹을 수없이 이겨내야만 하니까요. /82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저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이 짚어보기도 합니다. (중략)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의 이성은 줄거리를 예측하고, 작가의 의도를 가늠하고, 인물의 성격을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누군가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의 감성은 작가가 써놓은 적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 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중략) 그러므로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좋게 헤매는 경험입니다. /102
(『롤리타』를 이야기하며) 4피트 10인치라면 147센티미터니까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녀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는 것, 그런데도 험버트 험버트의 '품에 안길' 때가 꽤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보코프는 두번째 단락부터 바로 독자들을 도발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 독자는 밀란 쿤데라가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 자,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기 싫다면 여기서 책장을 덮으시오, 라고 나보코프가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독자는 작가와 일종의 합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가인 당신의 도덕적 판단을 무조건 수용하겠다'가 아니라 '이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일단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책을 읽는 내내 독자는 이 합의를 번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번복을 하고 책장을 덮어버립니다. /123
현대의 독자들은 험버트 험버트에 대해 간단하고 단호하게 윤리적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윤리적 판결과 별개로 작품의 매력이라는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주인공이 치료가 필요한 변태성욕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롤리타』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롤리타』를 계속 읽어나가는 독자는 하는 수 없이 주인공에 대한 혐오감과 작품에 대한 호감을 조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5
작품의 매력은 우리로 하여금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뫼르소와 험버트 험버트 라스콜니코프와 정신적 힘겨루기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하거나 사회적 통념과는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의 이야기에 나는 왜 매력을 느끼는가? 나는 괴물인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혹시 나는 너무 어더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저는 이런 의문들과 싸우며 한 권 한 권을 읽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중략) 그 책들을 읽고 나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이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인물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138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154 (평론가 신형철의 말)
반대로 소설은 우리가 '라스콜니코프' '롤리타' '히스클리프'라고 말함으로써 독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독선을 해체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와 연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일 겁니다. 가해자의 내면이 어느 정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한편 독자의 내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173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너는 괴물이다. 반성하라!"고 직설적으로 외치지 않고, 괴물의 내면을 이야기라는 당의정으로 감싸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시각으로 괴물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라스콜니코프도, 토니 소프라노도, 험버트 험버트도, 『파리대왕』의 소년들도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은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잘 모르고 있습니다. /177
밀란 쿤데라의 통찰에 동의하는가 아닌가를 떠나서, 우리는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와 요제프 K를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정렬할 수 있다는 것에 어떤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201
우리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하나의 책을 통해 그 우주에 들어갑니다. 책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자 다른 책으로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소설과 소설, 이야기와 이야기, 책과 책 사이의 연결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로서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면서도, 그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의 연결점을 찾아나가고, 그런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소설과 소설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독자는 자기만의 책의 우주, 그 지도를 조금씩 완성하게 됩니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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