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 내겐 심심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노력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심심하기 위해서라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심심함이 윤기 나는 고독이 되어갈 때 나는 씩씩해진다. 조금 더 심심해지고 조금 더 씩씩해지기 위하여, 오직 그렇게 되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 김소연/ 작가 소개 중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김소연 작가의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친구의 선물이었던.
그래서 그 흔한 김소연이라는 이름이, 뇌리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참 흔한 이름의 시인이 쓴
너무도 흔치 않은 제목의 책들(『수학자의 아침』, 『시옷의 세계』)이라서 그런가
유독 선명하게 대비되어 호기심을 부른다
제목 『시옷의 세계』라 하여 그 안의 소주제 역시 전부 ㅅ으로 시작하는데
다 읽고보니 들었던 생각,
그 시옷은 어쩌면, 사람 人자를 의미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사람의 세계, 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
그나저나 에세이를 읽고나니 너무도 소설고프다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나의 갈증에 바다를 주지 마세요,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같이,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같이.
올라브 H. 하우게,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29
매번 혼자서 여행을 떠나버리는 나에게 외롭지 않더냐고 친구는 물었다. 지독하게 외롭다고, 무섭도록 외롭다고, 그런데 그게 참 좋다고 대답했다. 외로움의 끝자리엔 이 밤하늘만큼이나 텅 빈 생각이 홀연히 찾아온다고도 말했다. 그럴 때 찾아오는 간소하디간소한 평화로움과 비로소 온몸이 무정형이 되는 듯한 자유로움에 대해서는 상투적이게 들릴까 봐 말하지 못했다. /31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단풍 드는 날」에서 /44
발터 벤야민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이 경계를 문지방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아이가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손을 넣는 순간부터 양말 속 선물을 만지게 되는 순간까지. 먹장구름이 우리 머리 맡에 잔뜩 운집해 있는 순간에서부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순간까지. 당신이 나에게 오기로 한 그날로부터 당신이 나에게 도착하게 되는 순간까지. 이 사이들. 이 짧은 시간 안에는 설렘과 긴장과 예감과 떨림이 농축돼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더없이 길고 긴 체험의 시간이다. 한 세계와 또 한 세계의 문지방 위에서, 기대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가장 농밀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화학적으로 성숙한다. 성숙에 대해 한 시인이 이렇게 말해놓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꽃」에서 /49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유희경, 「珉」 /56
친구는 살아오면서 잃은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잃은 것에 대해 말할 게 없는 사람이다. 친구는 잃었다는 상실감이 충격이 될 만큼 무엇을 가진 적이 있던 사람이고,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쥔 적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지만 온통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 같은 사람이다. /91
움베르트 에코 『추의 역사』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는 꿈이 아니라 심심함의 세계이다.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기술이 많아질수록 잃어가는 것이 많아진다. 심심함은 물리치거나 견디느 게 아니다. 환대하거나 누려야 하는 것이다. /146
한 번에 한 사람이 된다는 건 충분히 좋은 일
매일 다른 눈을 뜬다.
아침은 어김없이 오고
뜨고 싶은 눈을 뜬 날엔
은총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뜨고 싶지 않은 눈을 뜬 날에도
키스를 받고 싶다.
신해욱, 「눈 이야기」에서 /223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해욱, 「축, 생일」에서
어쩌다가 나 자신으로 돌아온 오늘, 도대체가 어색하다. 시인은 내 삶이 '나'를 독식해온 것을 목도해야 하는 고달픈 이 순간을 생일이라고 명명한다. 우리에게 생일이란, 나를 떠나 떠돌던 내가 어색하게 나와 마주하는 하루인지도 모르겠다. /226
그리고 254부터 260까지, 내가 가장 좋아한 부분은, 옮기기엔 너무 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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