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력적인 인물이 한꺼번에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소설이었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인물을 거의 만나지 못한다.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만의 세계를 살아가기에 드러나지 않는다. 난봉꾼같은 나가사와조차 매력적이다. 생뚱맞은 언동으로 일고나하는 미도리의 순수한 욕망이 사랑스럽고, 뭔지 모를 내면의 고뇌와 죽음을 껴안은 채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애쓰는 나오코는 공상 속의 여신 같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옮긴이가 정확하게 얘기해주었다. 정말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하나같이 매력적이라서 내 옆에 두고 싶기까지 했다. 특히, 미도리. 이제와 미도리같은 사람이 되기는 글렀고, 미도리같은 친구가 있다면 삶이 훨씬 다채로워질 것 같다. 웃을 일도 훨씬 많을 것 같고.
어렸을 적, 아마도 이십대 초반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읽었었는데, 며칠 전 도서관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빌릴 땐 그것이 다른 제목의 이것인지 모른 채 빌렸다. (ㅋㅋ) 그냥 최근 읽은 하루키 단편 『렉싱턴의 유령』에 홀려 하루키의 다른 장편 소설을 생각없이 골랐던건데. 우야튼 결과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은, 읽은 책을 한 번 더 읽은 최초의 책이 되었다. (실은 내 인생 최고의 소설이라고 꼽곤 했던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했는데 실패한 이력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던, 책 제목을 빌려 표현하면, 정말 노르웨이의 숲 같은 친구였다. 아닌가, 와타나베 같은 친구라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도 같고. 미도리와 레이코가 짚고 넘어간 와타나베의 말투, 그 말투를 모르기는 하지만, 그 친구도 말투가 꽤 특이했는데.
존 업다이크 『켄타우로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는 그에게 호감을 품었던 것 같다. 그의 가장 큰 미덕은 정직이었다.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오류나 결점을 인정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이라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61
"딱히 좋아하는 건 아냐. 무슨 색이든 아무 상관없어." 그녀는 또 내 말을 따라 했다. "난 네 말투, 진짜 좋아. 벽에다 흙을 깨끗하게 바르는 것 같은 느낌이야." /96
연설도 멋지고 해서 딱히 반론을 펼 생각은 없지만, 문장에 설득력이 없었다. 신뢰성도 없고 사람 마음을 끄는 힘도 없었다. 둥근 얼굴의 연설도 마찬가지였다. 늘 듣던 오래된 유행가였다. 같은 멜로디에 가사의 조사만 살짝 바꾼 것이었다. 이들의 진정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5
"물론 기꺼이." 나는 말했다.
레이코 씨는 눈꼬리에 주름을 깊게 잡고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기, 뭐랄까 말투가 참 묘하네.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남자애 흉내라도 내는 것 같아." /177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대해 다 알아버린 지금에 와서도 역시 그건 정말 멋진 연주라 생각해. 지금 다시 한 번 그걸 듣는다해도 난 역시 가슴이 두근거렸을 거야. 그 애의 교활함과 거짓과 결점을 전부 안다 해도. 있잖아,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는거야." /217
"와타나베, 영어 가정법 현재와 가정법 과거의 차이를 잘 설명할 수 있어?" 갑자기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대답했다.
"잠깐 묻고 싶은데 그런 게 일상생활에서 무슨 소용이 있어?"
"일상생활에서 무슨 쓸모가 있는 건 아닐 거야.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뭔가에 쓸모가 있기보다는 사물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훈련이 되지 않을까 싶어." /301
"친척이 문병 와서 여기서 같이 밥을 먹잖아, 그러면 모두 반은 남겨. 너처럼. 그래서 내가 덥썩 다 먹어 치우면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네. 난 가슴이 먹먹해서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어.'라고 해. 그렇지만 간병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농담이 아니야. 남은 그냥 찾아와서 동정할 뿐이야. 화장실 수발도 들고 가래도 받고 몸을 닦아 주는 건 바로 나야. 동정만 해도 대소변이 처리된다면, 그 사람들보다 오십 배는 더 동정할 거야. 그런데도 내가 밥을 다 먹어 치우면 나를 비난 섞인 눈길로 바라보며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네.'라고 해. (...)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지고서는 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를까, 그 사람들? 입으로는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 중요한 건 대소변을 치우느냐 치우지 않느냐 하는 거거든.(...)" /317
그 봄, 나는 꽤 많은 편지를 썼다. 나오코에게 일주일에 한 통을 쓰고 레이코 씨한테도 편지를 쓰고, 미도리에게도 몇 통을 썼다. 대학 강의실에서 편지를 쓰고, 집에서는 책상 앞에서 무릎에 갈매기를 앉힌 채 쓰고, 휴식 시간에 이탤리언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도 썼다. 마치 편지 쓰기를 통해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생활을 겨우 붙들어 두는 사람처럼. /431
▼ 비틀즈, 「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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