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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바깥은 여름] 김애란, 문학동네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로 김애란 작가님을 처음 만나뵈었던지라, 언제나 김애란 작가님의 장편소설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김애란 작가님은 단편도 정말 훌륭하시다... 서점에서 『바깥은 여름』을 읽을 때마다 울었던 것 같다. 포스팅을 하려고 글을 적으면서 또 울었다. 방금 사랑의 온도를 보면서도 울다 왔는데. 난 눈물이 많아서 다행이다. 온갖 스트레스를 눈물로 흘려보내는 기분이야.


『바깥은 여름』을 다 읽은 아이폰 사용자는 대부분 시리를 한 번 이용해봤을 것이고, 재이가 한 말의 의미를 검색해봤을 것 같다. 






[건너편]


도화가 이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곤 '늘 이런 식이야..' 생각했다. 도화가 이별을 준비할 때면 두 사람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생겼다. 이수가 새 직장의 면접을 앞두고 있거나, 도화가 승진을 하거나, 이수의 생일이거나, 누가 아픈 식이었다. 미래를 예측해 결론을 내리기 좋아하는 도화는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빤히 읽혀 울적했다. 과음한 이수는 하루종일 앓을 것이다. 술과 담배 냄새로 이불을 더럽히고 땀에 전 몸으로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두통을 호소하겠지. 그러다보면 우리는 오늘도 헤어지지 못할 것이다. -94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정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99




[풍경의 쓸모]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니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로도... 나이든 사람 말이다. -150


누군가 양동이에 소음을 담아 우리 머리 위에 쏟아붓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옆자리의 학생들이 몇십 분째 누군가를 맹렬히 헐뜯는지라 나는 그만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걔가? 그 교수랑? 어머, 어떻게 그래? 타인이 아닌 자신의 도덕성에 상처 입은 얼굴로 놀란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아는 즐거움이었다. - 153


'다른 집' 사람이 된 뒤에도 '우리집' 행사를 챙기는 건 아버지가 자주 해온 일 중 하나였다. 두 눈을 가린 사람이 손끝 감각에 의지해 사물의 이름을 알아맞히듯, 아버지는 '선물'의 형식을 빌려 인생의 중요한 마디마디를 더듬고 기념하려 애썼다. (중략) 그뒤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식 땐 전자사전을, 대학원 입학식 땐 넥타이를, 군 입대 즈음엔 손목시계를 보내왔다.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그러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모두가 하는 만년필, 모두가 주는 꽃다발, 그런. 그중 홍삼진액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그러니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안부가 뜸해졌다면 그건 아버지가 무심해진 탓이 아니라 당신 아들이 웬만한 사회적 의례를 다 마칠 만큼 나이든 까닭이었다. 당신 인생에도 내 삶에도 더이상 박수 치며 축하할 일이 생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최근 아버지로부터 몇 년 만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그게 당연히 아내의 임신 소식 때문인 줄 알았다. - 155


어머니는 이전에도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들에게 자기 남편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폭로하려 애썼다. 그래서 한때 내게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싫어하게 만든 뒤 자기 혼자 사랑하려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170


그런 어머니가 두 시간가량 정성스런 왓포 마사지를 받고 난 뒤 비 갠 듯 맑은 얼굴로, "누가 내 몸을 이렇게 오래 만져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아가씨가 스킨십을 하도 오래 해줘서 하마터면 정들 뻔했네."라고 말했을 땐 처음으로 태국에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170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 -182




[가리는 손]


그 고생을 하고도, 막상 젖을 끊을 땐 아이에게 미안해 조금 울었다. 속이 후련한 한편 우리가 함께 보낸 한 시절이 비로소 끝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건 아마 재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 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가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잘 알지 못할 테니까. -190


ㅡ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200


당장 내 엄마만 봐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그 말끔하던 고향집이 어수선해지고 엄마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에서 좀 심하다 싶게 자주 머리카락이 나왔다. 처음엔 엄마가 기력이 달려 집안일을 안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내 눈엔 잘 띄는 얼룩이 엄마 눈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시력이 약해진 엄마 입장에선 먼지를 안 치우는 게 아니라 먼지가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 -201


엄마 발인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긴병에 효자 없다는데 네 엄마가 너 고생 안 시키려고 그리 급히 떠났나보다'라는 얘길 들었다. 그 말은 나를 몹시 아프게 찔렀는데, 정말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 없는지 자문했을 때 쉽게 답하지 못한 까닭이다. 내 효심이 우리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면 어쩌나 늘 두려웠다. - 203


선량한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혹시 넌가?' '너였을까?'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이었을 거야. -203


아무리 바빠도 음식을 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접시에 담으려 노력하는 건 내가 부모 세대와 반 발짝 다르게 사는 법이다. 말은 반보라지만 실은 결정적으로 다르게 사는 방식. 낙향 후 그나마 주거비가 덜 들어 생긴 여유일지 모르나 평소 재이에게도 음료를 병째 마시지 말고 컵에 따라 먹으라고 잔소리한다. 그렇게 작은 것들이 나중에 큰 걸 지켜주기도 한다고. - 209


이걸 어찌 설명하나, 말한다고 네가 알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을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 214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지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내가 쓰는 물 소리, 내가 닫는 문 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안을 떠다녔다.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예의'였다. -238


ㅡ논문 마치면 한국 들어갈 거지?

ㅡ 모르겠다. 학위를 딸 수나 있으려나. 돌아가도 별거 없고.

ㅡ 밖에 있으면 안에서 쌓은 게, 안에 있으면 밖에서 만든 게 부러운 모양이더라. 공부하는 사람들.

현석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255


ㅡ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시리가 되물었다.

ㅡ 어디로 가는 경로 말씀이세요?

ㅡ...

ㅡ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ㅡ...

ㅡ죄송해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ㅡ...


시리가 사용자의 침묵에 호응하는 일은 드문데 이상했다. 그것도 연거푸 세 번이나 그러는 게. 어쩌면 저 먼 데서 '누군가의 상상을 상상하는' 인간이 이런 일을 예상하고, 프로그램 안에 '걱정'을 이식해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259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