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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를 알게 된 건,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통해서 였다.
이후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만화책으로 읽게 되었고,
조금 더 알아가보니, 난 이미 그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봤었더랬다.
그땐 영화 감독에까지 관심을 갖지 않아서 몰랐던 거였고.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듣게 되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알게 되었으나
이 두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다.
대신에 최근 개봉한 '세 번째 살인'을 관람하였고
그의 영화 중 재개봉한 '원더풀 라이프'를 보려고 벼르고 있다. (그러나 계속 시간이 맞지 않는다t_t)
좋아하는 소설 작가는 있으나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 감독은 없었던 내게
어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필모그래피를 전부 챙겨보고싶은' 첫 번째 영화 감독인 셈이다.
영화 감독이기만 한 줄 알았던 그는, 사실 영화계에 발을 들이기 전 TV 방송쪽에서 활동하셨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에세이였고,
특히 신문과 방송, 언론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꽤나 많았는데,
미디어가 행하는 폭력의 모습이, 일본에서와 한국에서의 차이가 크게 없다고 느껴질 만큼 공감되었다.
<상에 대하여>
... 사고 유족이 가족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해가는가. 그 과정을 자세히 추적한, 감동적이면서도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 책에 "사람은 상중에도 창조적일 수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애도 과정은 슬프고 괴로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사람은 성장하기도 한다고, 나는 그 뜻을 그렇게 이해했다.
(중략)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45p
<결핍>
... 인간은 자신의 결점을 노력으로 메우려 한다. 그러한 노력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미덕으로 그려진다. 꽤 오래전부터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극복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일까? 이 시는 이렇게 우리의 가치관을 되묻는 것 같았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60p
<저기, 그것 좀 줘>
연출은 연기 지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감독이 열 명 있으면 열 가지가 존재하는 애매한 것이다. 그러나 내 경우 목표로 하는 한 가지만은 명쾌하다. 영화 속에 그려진 날의 전날에도 다음날에도 그 사람들이 거기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영화관을 나온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 줄거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내일을 상상하고 싶게 하는 묘사. 그 때문에 연출도 각본도 편집도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1p
<수염>
당시 두 살이었던 나는 이 TV 방송을 책상다리를 한 아버지의 다리 위에 오도카니 앉아서 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TV에 빠져든 내 볼에 까슬까슬한 아버지의 수염이 스치던 그 감촉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중략) 아버지 통야때의 일. 조문객이 모두 돌아가고 조용해진 사찰에서 오랜만에 아버지와 둘만 남게 됐다. 관의 작은 창을 여니, 코를 고는 듯이 아버지가 입을 벌리고 있다. 이대로 고별식을 하는 것은 보기 흉하다고 생각해, 수건을 말아 아버지의 턱밑에 댔다. 그 순간, 내 손에 까슬까슬한 수염이 닿았다. 30년 만에 그리운 그 기억이 되살아나 처음으로 울었다. 아침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204p
<올바름>
설사 아무리 극악한 인간이라도 누군가가 살해당한 것을 기뻐하는 행위는 적어도 남 앞에서는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원래 성격이 비뚤어져서이기도 하지만, 방송일을 시작할 때부터 작심한, 8할의 인간이 그 '옳음'을 지지할 때 2할의 소수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는 태도와, 또하나의 이유에 근거한다. 올바른 전쟁과 잘못된 전쟁이 있는 게 아니라, 전쟁 자체가 나쁘다는 신조에 따른 것이다. 전쟁은 정치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정치의 한 부분이라는 목소리도 들려오지만, 사람을 죽여서 찾아오는 평화가 있다면 신문도 방송도 존재 의의를 잃는다. 저널리즘은 무력행사 이외의 방법을 끝까지 믿고, 모색하고, 그것에 몸을 바치는 가치관이다. 그것은 일찍이 '옳음'을 부추겨, 권력과 하나되어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몬 것에 대한 반성으로서 언론이 떠안은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216p
<망각>
우리가 4개월 전에 경험한 것은, 일본 어느 곳에 사는지에 관계없이, 지금까지 우리가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잊은 척하며 내달려온 문명을 근본부터 되묻는 사건이었다. 그 풍경을 앞에 두고, '미래'나 '안전'보다도 '경제'를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경멸스럽다. 사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댐과 도로가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그것이 쓸데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돈이 움직인다는 식의 구도가, 원전을 둘러싸고도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눈을 흐리는 큰 원인 중 하나는, 신문과 방송이라는 미디어가 벌써 망각 쪽으로 방향키를 돌렸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도 역시 기득권층의 이익 안에서 눈이 흐려져버린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2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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