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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사이공 나이트] 정민, 나무옆의자


제 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중에서 안 읽은 두 권 중 한 권.

표지 느낌이며, 디자인이며, 정말 내 스타일인데 내용이 영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아서 손이 가지 않던 책.


다 읽고 난 지금도, 아, 이 책은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구나. 생각한 책.

제 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중에서는 가장 실망스러웠던 책.

'그 옛날 식민지 거리의 검은 밤'을 소설로 그려내고 싶었다던 작가님,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세계를 그리셨다.




사이공 나이트

저자
정민 지음
출판사
나무옆의자 | 2013-10-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편의 영화 같은 소설!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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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김기승(아내: 흐엉, 딸: 세희), 오순철(아내: 은혜), 양도식, 김대수, 린, 응언, 민 형사, 수성, 등.


우선. 주인공들 관계도부터 너무 어려웠다. 웬만하면 메모까지 해서 읽는 성격이 아닌데; 

오죽이나 머리에 안 들어왔으면. 포스트잇에다가


1. 기승: 도망간 놈 & 흐엉

2. 순철: (형) 

3. 대수: 첫날 호텔 방. 길고 뾰족.

4. 도식: 대수에게 전화한 사람 & 린


이렇게 메모해두고, 대수가 누구였더라, 생각나지 않으면 다시 포스트잇을 훔쳐보며 간신히 이야기를 따라갔다.


나의 소설 몰입도를 방해한 것 중 또 한 가지는, 수사가 너무 길었다는 점.

사람 한 명을 설명하거나, 주변 분위기를 설명하거나, 하는데 쓸 데 없이 문장이 너무 길었다.

작가님은 필요하다고 생각한 수사겠지만, 나에겐 쓸 데 없다고 느껴진 것들.


예를 들면, 


"월남전쟁 때나 울려퍼졌을 것 같은 다연발 기관총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의 엔진 배기음, 9층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마저 깜짝 놀라게 만드는 택시의 신경질적인 경적, 단체 관광객을 대상으로 불법 복제 CD를 파는 노점상이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마구 뒤섞여 대수가 누워 있는 객실의 창문 사이를 파고 든다. 12"와 같은 문장의 경우, 


"오토바이의 엔진 배기음, 택시의 신경질적인 경적, 노점상이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마구 뒤섞여 대수가 누워 있는 객실의 창문 사이를 파고 든다."라고 줄여도 전혀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내 호흡이 짧은 탓인가.

갑자기 한국말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영어문장은 처음 나오는 주어 동사에 핵심이 담겨 있으니까.


또 다른 예들.


어쩔 수 없는 짜증을 유발하는 도시의 소음과 누군가의 턱에 한 방 주먹을 날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에어컨의 불쾌한 냉기에 대수는 잠에서 깼다. 12


미시시피 강을 항해하던 젊은 마크 트웨인이 탔을 법한 증기선의 대형 회전차를 닮은 팬이 천천히 돌아가는 객실 천장을 대수는 멍하니 쳐다보다 눈길을 돌렸다. 12


왼손으로 커피가 담긴 유리잔을 감싼 도식은 대도시에서 배출되는 하수 찌꺼기와 비슷한 색깔의 검디검은 커피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20


성의 없이 건성으로 추출한 듯한 싸구려 커피 향, 닭고기 육수의 노린내, 아침부터 만취한 뱃사람이 방금 내뱉은 듯한 퀴퀴한 담배 연기, 대낮의 격렬한 교접을 부랴부랴 마친 후 샤워를 생략한 중년 남자의 몸에서 나는 듯한 땀 냄새, 터무니없이 낮은 급여를 받는 식당 종업원들이 마구 뿌린 싸구려 향수 냄새가 도식의 주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20 


국수를 다 먹고 젓가락을 놓은 도식은 30달러짜리 노키아 휴대 전화의 흑백 액정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20




나는 짧고 간결한 문체가 좋다. 예를 들면, 


"이불을 확 젖히고 벌떡 일어난다. 책상 위의 전화기를 집어들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엎드린다. 액정을 켠 다음 떠오르는 배경화면에 대고 속삭인다. 잘했어. 한번 더 말한다. 착해. 최근 통화기록을 띄운다. 가장 위에 있는 번호, 열한 개의 숫자. 중요한 암호나 되는 듯 머리에 새긴 뒤 저장버튼을 누른다. 이름이 들어가는 칸에 이, 채, 영을 입력할 때의 벅차고 두근거리는 마음. 이제 단축번호를 등록한다. 그러고는 초기화면으로 돌아온 뒤 다시 전화부를 검색, 단축번호를 눌러 거기에 뜬 이채영이라는 글자를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소년을 위로해줘, 115)"


물론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는 소년 소녀 이야기라서 조금더 발랄한 분위기이기 때문에, 사이공 나이트와 비교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호흡이 짧은 관계로. 이러한 문체가 좋다. 딱, 딱, 끊기는. 핵심만 전달하는. 수사가 길지 않은. 




그래, 어쩐지 요가할 때도 호흡 따라하기가 제일 어렵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