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서른 번의 꼭지.
이렇게 꼭지를 많이 접은 책은 처음이다.
네 책도 아니고 빌린 책인데, 그렇게 접어도 되냐고 아는 사람한테 혼이 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지나치게 많이 접긴 했으니까. 인정.
내 나름으로 세운 선독서 후구입 원칙에 따라서,
이 책은 소장가치가 있다고 판단, 조만간 구입을 하려고 한다.
# 주인공 이름: 민현, 이세길.
과거와 현재, 즉 여덟 살에 만난 민현과, 현재 내 곁에 연인으로 함께 하고 있는 민현을 오가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제목 그대로 단 한 번의 연애다.
과연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싶은. 그런데 읽다 보면, 이 정도의 여자라면 나라도 반하겠다, 싶은.
이 책에는 소제목이 따로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이다.
그나마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문단 구분으로 자체적으로 쉬어주기는 하는데;
소제목이 없으니까 은근히 나 혼자서만 괜히 숨가쁘다.
그런데 주인공은 왜 하필 고래잡이의 딸이었을까.
최근에 읽은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도 할아버지가 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성석제의 <위풍당당>과 헷갈려서;
같은 작가가 두 작품에 걸쳐서 '고래'를 소재로 썼는 줄 알았다.
결국 아니긴 했지만.
갑자기 천명관의 소설 <고래>가 떠올랐다. 그 고래도 같은 고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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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각양각색, 가지각색의 이유로 꼭지를 접었다. 일일이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궁금하면 우리 나중에, Face to face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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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그녀가 인생의 후반기의 접어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젊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육체의 소유자라는 것. 영혼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14
그녀는 현존하는 인류 가운데 그런 혜택을 가장 많이 입을 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녀가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했는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그녀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인 십몇 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젊어 보인다. 하지만 영혼의 젊음은 가장할 수가 없다. 모험심과 열정은 어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을 수가 없다. 민현의 정신적, 육체적 나이가 얼마든 내게는 여덞 살 때 처음 만났을 때의 소녀가 남아 있다. 15
관심이나 좋아한다는 감정은 물이나 기압처럼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우주선에 구멍이 뚫렸을 때 우주선 속에 있던 승무원이나 부서진 부속이 진공과 다름없는 캄캄한 우주 공간으로 빨려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고능력이 없는 우주 공간이나 우주선과 달리 인간은 관심의 높낮이 정도를 직감적으로 인식한다. 혹은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낀다. 관심이 높은 쪽에서는 억울하다 하더라도 관심이 낮거나 없는 상대에게 자신의 일부, 시간이 빨려 나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18
"왜 우리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계속 되풀이하는 거지? 그 시절이 그렇게 좋기만 했을까? 그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편해져서?"
"지나간 옛날, 유년기에 관한 이야기는 해피엔딩 영화나 소설처럼 안전하거든. 이미 지나긴 일이니까 말이야. 더 이상의 위험성, 폭발성이 없는 이야기로 전환되었다고." 30
"우리가 인생에서 느끼는 기쁨의 구십구 퍼센트는 첫 경험에서 나와. 노래나 영화는 옛날 들었던 원곡, 원작이 좋고 도시는 고향이, 집은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이 최고지. 어떤 이야기든 처음 들었을 때 감동이 크잖아. 과거에 대해서 인간은 늘 긍정적으로 기억하게 되어 있어. 설령 그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도. 우리의 뇌가 설탕처럼 좋아하는 게 바로 그거니까. 어린 시절, 사춘기 또는 청춘 시절에 좋아하던 음악, 영화, 유행, 제품, 음식, 모든 것에 대한 취향은 평생을 가." 31
"태어날 때 부모의 직업이 뭐였느냐, 초등학교 때 누가 짝이었느냐 하는 게 왜 중요하냐 하면 삶의 옵션이 별로 없던 때여서 작은 인자라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야. 그게 두고두고 인생 전반에 영향을 주는 건 나비효과고." 31
아름다움은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유전자처럼 하늘에서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먹는 것이 아름다움을 구성한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바늘 끝만 한 차이가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씻는 것은 아름다움의 절대적인 요소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얼마나 씻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입는 것 또한 아름다움의 절대적 요소라는 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중략... 무엇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미추가 결정된다. 머리카락은 어떤가. 머리를 다루는 수많은 가게가 옷가게 못지않게 많다는 것이 머리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피부는 또 어떤가. 이는? 귀는? 입술은? 목은? 젖가슴은? 손 모양, 발 모양은? 살은? 근육은? 건강미는? 몸 전체의 균형은? 이 목록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댑분의 사람들은 벅차 한다. 아름다움을 가꾸는 건 엄청난 자원을 필요로 하는 훈련된 직관에 따른 숙련된 노동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신의 노동이든, 남의 노동이든 간에. 33
하지만 나는 민현을 영원히 기억할 운명, 종속될 운명이었다. 그녀를 보면서 몰입이 뭔지 배웠다. 35
커피를 마시면 동일한 개체에 있는 에너지, 활력을 미리 당겨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어차피 제한되어 있는 에너지를 미리 쓰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기력해지고 의욕이 떨어지고 짜증이 나면서 불안해지지." 40
내가 민현처럼 돌발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제 마음에 따라 변덕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임을, 그에 따라 얼마든지 세상이 뒤바뀌고 나도 세상을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걸 알게 해 준 민현에게 감사해야 했다. 75
그때 내 입에서 의도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우연 같은 필연이, 필연 같은 우연한 선택이,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축적해 둔 에너지가 분출해 운명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데 내 인생 전체를 걸 수 있다.
" 오늘 우리 참 오래간만에 좋은 대화를 한 거 같다. 또 만날 수 있겠나?" 85
표를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매표구 안에 앉아 있는 여자는 내가 어른인지 미성년자인지는 물론 인간인지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116 (아진짜.ㅋㅋㅋ 성석제 글은 가끔 너무 웃기다.ㅋㅋ)
어떻든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고 그 몸부림에 내가 가진 에너지의 대부분의 투입되었다. 그러자니 다른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기억인지도 모른다. 기억할 만한 일을 만들어 낼 만한 힘이거나. 137
민현은 여고에서 수석을 다투는 성적이었으므로 당연히 서울 국립대학에 원서를 냈을 것이었다. 그 대학에 원서를 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인종이 다른 듯한, 아니 인간과 침팬지처럼 종이 다른 듯한 느낌을 줬다. 144
"나는 너처럼 많이 알고 똑똑한 여자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 피부에는 나이가 들수록 주름이 생기지만 대뇌에는 주름이 많아질 수록 우월해지는 거니까." 158
손에는 늘 책과 노트가 함께 묶여진 책 꾸러미가 들려 있었는데 그건 모양으로, 혹은 유행에 따라 여대생들이 들고 다니는 것과 달리 실제로 언제든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와 이야기하는 중에도 갑자기 책을 펴들고 궁금해 하는 항목을 찾기도 했다. 책에 몰입해 있을 때 민현에게는 전기 울타리라도 쳐진 듯해서 나처럼 놀기 좋아하는 남학생은 물론이고 '댁이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을 예정인 성모 마리아요'하고 알리러 온 천사라 할지라도 선뜻 다가서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 164 (ㅋㅋㅋㅋㅋㅋ)
민현 때문에 나는 사르트르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걸 꼽다 보니 <구토>가 손에 잡혔다. ...중략... 어느 날 갑자기 로캉탱은 원인을 모를 구토 증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나 역시 지루해서 구토가 날 것 같았지만 참고 읽었다. 166
나는 <구토>를 읽고 나서 실존주의든 자본주의든 무슨 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어지럽고 구토할 것 같은 증세에 시달렸다. 뱁새가 황새를 좇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은 바로 내게 해당되는 것 같았다. 177
서울역으로 오는 동안 나는 철로 변에서 나무와 꽃을 키우며 사는 집들이 띠처럼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무척이나 평화스러워 보였다. 고향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여러 개의 꽃나무 화분을 가지고 있었다. 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화분을 집 앞에 내놓아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었다. 각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기를 줄 알고 즐길 줄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고향에 살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182
나는 하필 이런 때 태어나 이렇게 자랐고 이런 상황을 맞았다 뿐이지 민주화 투사도 아니고 남들을 깨우쳐 행동으로 이끄는 지사도 아니다. 그저 대학 다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려다 보니 전경이 되었고 별 문제가 없이 제대를 할 날만 기다리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뼛속까지 평범하다. 네가 말하는 그런 위대한 행동을 할 만큼 용기도 없고 동기도 없다. 그런 건 난 모른다. 214
내가 민현의 마지막 연인이 된 데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녀의 전남편, 남자, 연인, 숭배자, 그저 하룻밤 잔 상대, 그 누구든 질투하지 않는다. 그들을 일일이 질투했다면 나는 진즉에 말라 죽었거나 그녀를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녀는 단 하나뿐이지만 세상에서 그녀를 원하는 사람은 많다.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능력이 있는 인간들에게는 권력이든 금력이든 운이든 열정이든 젊음이든 뭔가 대가를 치를 만한 게 있다. 내게는 없다. 대신 내게는 '질투가 없다'는 자산이 있다. 이처럼 '마이너스 계정'이 힘이 될 수도 있다. 260
언젠가 나는 평범하고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부족하며 생긴 것까지 그녀의 상대가 되기에 어울리지 않는 나를 좋아한 이유가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나를 해치지 않고 나를 독점하거나 내게서 뭘 빼앗아 가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준 건 네가 처음이야."
내가 그녀를 언제까지고 좋아할 이유? 그녀는 언제든 다르게 보인다. 닿을 듯 말 듯 나를 미치게 만든다. 267
나를 위해 책을 샀다. 음반을 샀다. 좋은 차를 사서 마셨다. 커피 도구를 사 모았다. 자전거를 탔다. 그 어느 것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음미하려면 최소한 일 년 정도는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분야든 프로스포츠 선수가 되는 데는 평균적으로 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루 여덟 시간씩 꼬박 자전거만 탄타고 하면 삼 년 하고도 반 년이 더 드는 셈이다. 나는 아마추어로 충분히 즐기는 정도에서 멈추고 다른 즐거움으로 옮아 갔다. 279
끝이 없는 것도 있다. 책이며 음악 같은 게 그런 종류다. 늦도둑질에 밤이슬 젖는 줄 모른다더니 내게 책이 그랬다. 하나에 관심이 생겨서 책을 구해 읽기 시작하다 보면 감자 줄기처럼 주렁주렁 더 읽어야 할 게 생겼다. 결국 해당 분야의 경계를 넘어서서 인접 분야에도 손을 대게 되었다. 민현이 수십 년 전 충고한 대로 역사를 공부하게 됐다.
요즘 책을 쓰는 인간들은 쉽고 재미있게도 쓴다. 도저히 읽는 것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책은 중독성이 없는 중독의 세계다. 지성의 네트워크에 닿게 되면 고대의 철학자에서 현대의 젊은 천재까지 모두 만날 수 있게 된다. 지성의 쾌락을 경험하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다. 고향의 새 집으로 이사할 때 헤아려 보니 책이 트럭 두 대분이나 되었다. 트럭 운전기사 말로는 서점이나 대본소가 폐업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새 책을 사다 읽는 틈틈이 예전에 읽었던 책을 스캔하고 있다.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 두면 검색을 할 수도 있고 모니터와 프린터로 언제든 출력해서 읽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검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새로 읽고 있는 책과 과거에 읽은 책에서 언급된 것을 연결하고 비교하면 흥미로운 게 많다. 그 또한 내 나름의 네트워크가 된다. 나처럼 개별적인 지적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들이 전 세계에 수백만 명이 있고 그들과 이따금 연결이 되어 자료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한다. 이 또한 엄청난 중독성이 있다.
음악 또한 중독성 없는 중독의 세계이다. 음악에도 당연히 개별적으로 음악 파일을 가지고 있는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있어 이들과 정보와 자료, 감동을 교환한다. 중복되는 곡이 많지 않은 음악 파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보물섬을 발견한 기분이 된다. 음악과 책, 일생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을 가진 두 가지에만 몰두한다 해도 백 년 인생은 너무 짧다. 280
가장 큰 대가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일 것이다. 자긍심의 부수입은 아름다움이다. 내면과 외면 모두의. 282
그건 내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깨달음의 몽둥이질 같았다. 인생에 특별히 깨달을 건 없다는 깨달음. 중요한 건 살아가는 것이라는. 중요한 건 존재하며 느끼는 것이라는. 288
생각해 보니, 내게 행복은 기억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297
나는 멋진 인생을 살았어. 너 때문에. 당신 덕분에. 고마워. 고마워요.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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