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과 있던 어느 날 오후, 끓는 물이 들어있는 커피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_ <단순한 열정>
어디에선가 들은, 수업 발표 주제.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등학교 때였다.
체육대회 계주 선수로 뽑혀서.ㅋㅋ 나를 포함한 계주 선수 네 명이서 학교 건물 뒷쪽에서 바통터치 연습을 한 적 있다.
학교 건물 바로 뒤쪽으로 펜스가 처져 있어서 폭이 좁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달리기는 직선으로 하니까 크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바통이 넘어오고, 넘어오다가, 마지막 주자인 내게까지 전달 됐고,
나는 전력질주했다.
그러다가 부욱, 하고 체육복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팔뚝에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
건물에 삐죽 튀어나와있던 쇠가 겨울용체육복을 찢고, 내 살까지 파고 들었던 것.
피가 뚝뚝.
나 어렸을 적에는 은근히 칼빵이 유행했는데, 그 상처가 칼빵처럼 보이기도 해서.ㅋㅋ
나 칼빵했던 여자라고 농담처럼 얘기하기도 했다.
그 상처가 여전히 남아서, 볼 때마다 그 날의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올해 광복절에 다녀온 메디앙스 엠티에서는,
바닷가가 문제였는지, 엠티 뒷풀이 때 먹은 회가 문제였는지, 그 날 이후로 생긴 피부병 때문에
양쪽 다리에 점박이가 군데군데 있다.
곧 사라질 점박이들이겠지만 이놈의 점박이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간지러웠고, 간지러움이 얼마나 괴로운 것이며;
그럼에도 회 먹은 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ㅋㅋ 생각했었다.
살면서 먹은 회 중에 제일 맛있었고, 제일 맛있는 매운탕이었다.. 진짜.T_T
27년을 살았는데, 내 몸에 이런 식으로 추억할 수 있는 역사가 남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이렇게 나는 '흔적'이 남는 것이 좋다.
사진을 찍고, 편지를 쓰고, 일기를 쓰고, 책을 읽다가 꼭지를 접어두는 것도 모두 다 흔적.
내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생각을 했었고, 어떤 문장을 좋아했었는지에 관한.
내 흔적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흔적 역시도 반갑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읽다가 접어둔 꼭지가 그대로 있는 책이나, 좋아하는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책을 좋아한다.
책을 너무너무 소중하게 여기는 나머지, 밑줄도, 꼭지접기도 허용하지 않던(물론 본인에게조차) 사람이 있었는데
그렇게 새 책처럼 남겨서 무엇하나 싶다.
기억에는 한계가 있어서, 흔적이 남지 않으면 결국 잊혀지고 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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