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보름 전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책장이 거실 벽 한 켠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집이었다. 그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니 자꾸 내 눈동자가 책 제목을 훑었다.
대화 주제가 왔다갔다했는데 그게 다 책 때문이었다.
나의 근황 얘기를 하다가도, "어 여기에도 <새의 선물>이 있네"하면서 <새의 선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했고
신혼 얘기를 하다가도 "어 너 <보헤미안 랩소디> 읽었어?"라고 물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 나 혼자 결론내리기를, 나도 결혼하면 거실 한 켠을 책장으로 채워야겠다, 했다. 대화거리가 끊이지 않도록.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었다. 예전에 강남 교보문고에서 서서 잠깐 읽었다.
전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우연히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 등장하게 된다는 내용이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오히려 단 한글자도 읽지 않았을.ㅋㅋ)
'어떤 할아버지가 양로원 창문에서 뛰어내려 우연히 돈가방을 훔치게 되고, 모르는 지역, 모르는 사람 집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까지만 기억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 할아버지가 돈가방 주인한테 잡히느냐 안잡히느냐, 그 결론을 목전에 두고 책을 덮었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과 슬이의 추천으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라는 여행 에세이를 빌려왔다.
요즘은 지나치게 novel-holic 이라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는 그 언젠가 구미가 당길 때 읽는 걸로 하고
우선은 <블라블라 100세 노인> 부터.
다 읽고 난 후의 한 줄 감상평 -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난 후의 느낌과 같다.
<미드나잇 인 파리>도 등장 인물에 관한 배경지식이 많았다면 200% 즐기면서 감상할 수 있는 영화였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스토리일 뿐.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쉬움이 참 컸었는데,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후의 마음이 그 때와 꼭 같았다. 어마무시하게 아쉬웠다.
사람마다 소화할 수 있는 글이 다른 것 같다. 후천적인 연습을 통해서 바뀔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난 역사와 관련한 글은 도저히 읽히지 않는다.ㅋㅋ
이해가 안돼, 이해가. 정리가 안되고,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인물 관계도가 뒤죽박죽이다.
부끄럽지만 언젠가부터는 그냥 이런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역포자. 역사포기자.
내가 굉장히 기피하는 그 역사지식을 많이 알았다면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나는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50%도 즐기지 못한 듯하다.
그럼에도 이것은 /문화컨텐츠/이기에 그것이 갖고 있는 장점 덕분에 나에게도 남는 것이 있었다.
/지식/은 소화하지 못하면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만
/문화/는 그것이 영화가 되었든 책이 되었든, 시든 음악이든 각각의 소비자에게 something, 어떤 식으로든 남으니까.
▼ 내게 남은 문장들 ------------------------------------------
알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터, 쓸데없이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271
유리 보리소비치와 알란 엠마누엘은 금세 친해졌다. 유리는 알란이 이유도, 행선지도 모르는 채로 생판 모르는 사람을 선뜻 따라나선 것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너무나도 부러운 무사태평한 성격이었다. 한편 알란은 자신의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상을 강요하려 들지 않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좋았다. 273
그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만사는 그 자체로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둬야 하지. 왜냐하면 만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거의 항상 그래. 317
왜 가벼운 악수 교환에서 두 대통령과의 정식 오찬으로 급작스럽게 변경되었는지 알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387
[번역가의 말] 아, 내게 이런 영감님 같은 친구가 있다면 삶은 얼마나 유쾌하고도 가볍고도 행복할 것인가!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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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번역가의 말이 핵심이다.
영감님 같은 사람이 되거나, 그럴 수 없다면 그런 친구를 옆에 두고 살고 싶다. 하지만 그 둘 다 쉽지 않아t_t
그러니까 소설이고, 그러니까 Best-seller겠지? 쩜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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