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수상한 식모들을 읽고 문학동네 작품에 살짝 실망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계문학상 수상작들로만 빌려야지 결심하고
스타일(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미실(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등의 위치를 출력하고 813번쪽으로 가는데
앗 내 계산에 없던 빌리고 싶은 책들이 연이어 보인다.
기분 좋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한정된 선택을 하고서도 내가 놓친 기회비용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 않는 갈림길.
오히려 아 다음에는 저 책을 빌리면 되겠구나 하고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잠들기 전, 내일 아침에 먹을 생각으로 냉장고에 샌드위치를 넣어두는 기분과 같다.
그래서 내 손에 쥔 다섯권의 책은
달의 바다/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향수/ 그리고 산이 울렸다/ 허클베리핀의 모험
달의 바다를 가장 먼저 골라 읽었고
아 이 책은 사야겠다고
2.
읽는 내내 다양한 입장에 서게 되었고, 때마다
이런 고모가 있다면
이런 할머니가 있다면
이런 엄마가 있다면
이런 친구가 있다면
이런 딸이 있다면.
주인공 은미, 그녀는 참 나처럼 별 것 없는 일상 속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녀가 자꾸 부러워졌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이렇게 중요하다.
정작 본인은 별 볼일 없는 것 같아도.
갑자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떠오른다.
나 그 책을 읽을 때도, 그 노인이 내 친구였으면 했다.
3.
임신 사실을 6개월만에 알리고, 미혼모가 되고, 누군가는 자살을 할 뻔하고, 또 다른이는 성전환수술을 하고자 하며,
NASA에 근무하면서 우주비행으로 달에 다녀오는,
마치 큰 꼭지만 얘기하면 스케일이 엄청난 소설일 것 같은데 막상 읽고나면 그렇게 일상적일 수 없는 따뜻한 이야기
갑자기, 중력이 사라진 곳에서 두둥실 떠올라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
주인공: 은미, 민이, 순이 고모, 조엘, 할머니, 할아버지, 레이첼, 찬이,
▼ 내게 남은 문장들 -------------------------------------------------------------------------------
"당신은 세상을 하나의 논리로만 평가하는 게 문제예요. 쟤는 취직에 잠깐 실패한 것뿐이지, 인생 전부에 실패한 건 아니라구요." 41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단 한 명 있다면 그건 너여야 돼. 그런데 왜 이렇게 늘 모나 있냐구!" 47
"내가 장담하는데, 은미야, 넌 큰사람이 될 거야."
고모는 정색을 하고 말하더니 또 키힉, 웃었다.
"내가 아는 매력적인 사람들 중에 거짓말에 서투른 사람은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거짓말을 잘하는 순서대로 재미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나 할까?"
나는 고모를 쳐다봤다. 정말?
"매너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야."
고모는 내 손을 잡고 흔들면서 걸었다.
"그래서 난 네가 좋더라. 연필공주."
샌들 값을 무이자로 갚는 데 거의 일 년이 걸렸다. 고모는 그 일을 비밀로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직접 증명해 보였는데, 그 일의 파장은 결코 샌들 하나로 끝날만한 게 아니었다.
고모는 육 개월이 될 때까지 임신 사실을 숨겼다. 거짓말치고는 정말 스케일이 컸다. 51
드라이브가 길어질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꽤나 괜찮은 팀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과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상대방과 내가 한 팀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민이가 기어를 바꾸고 사이드미러를 조절하는 작은 동작조차도 내게는 너무 익숙해서, 우리 사이의 공기에 파문을 일으킬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침묵 속에서도 편안함을 느꼈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양쪽으로 잡아당겨 길게 늘이는 것처럼 아팠다. 내가 손에 얼굴을 묻어버리자 당황한 민이가 차를 길가에 세우려고 했다. 72
우주에 다녀온 뒤 다음 비행을 포기했던 비행사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죠. 그건 인간만이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선택한 대로 사는 인생이죠.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이 무엇 하나 동물보다 나은 것이 있겠어요? 109
시간이 아무런 부피감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112
"혼자가 돼서 한 푼 없이 거리로 나섰는데 이상하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더라. 그렇게 되면 내가 지나온 그 시간들이 전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오기인지는 몰라도, 나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싶었어. …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 뿐이야."
"왜 할머니한테 가짜 편지를 쓴거야?"
고모는 미소를 지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 127
'문화생활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타일] 백영옥, 예담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0) | 2015.03.11 |
---|---|
[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민음사 (0) | 2015.03.06 |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황현진, 문학동네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0) | 2015.02.14 |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2] 김민서, 휴먼앤북스 (0) | 2015.02.09 |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1] 김민서, 휴먼앤북스 (0) | 2015.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