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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눈앞의 사람을.




내 앞의 사람이 자꾸 날 잃어간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묵묵히 바라보다가

속시원히 얘기하지 못하고 그냥 썽을 내버렸다

마치, 연인사이에서 사소한 이유로 토라져버린 여자친구처럼.

앞사람은 당황스러웠을지도.

여자친구가 왜 화내는지 몰라 답답한 남자친구처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림 여행을 권함에서 찾았다

이 페이지를 보여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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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본다는 것, 그린다는 것


가령, 그려 보겠다는 생각 없이 한 여성을 만났다고 하자. 내가 그녀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끼지 않는 한, 그녀와 헤어지면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다. 모든 게 대충 기억날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잊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하면 달라진다. 무슨 색깔의 옷을 입었는지, 말을 하면서 손을 많이 쓰는지, 손은 큰지 작은지, 손마디는 어떤지, 목선은 곧은지 구부정한지, 눈을 쳐다보며 말하는지,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는지, 실내에서 외투를 벗는지 그대로 입고 있는지, 가방을 무릎에 껴안고 있는지, 질문을 받을 때와 할 때의 표정은 어떻게 다른지.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된다.


관찰들을 종합해 그림에 반영하는 건 아니다. 이미 그림은 그려진 셈이다. 흔히 어떤 영화를 평할 때, 이 작품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훌륭히 '그려 냈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바로 그때의 그림이 내가 말하는 그림이다. 나는 매우 넓은 의미로 그림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꼭 연필을 들지 않더라도 그림은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면밀히, 주의 깊게 보는 것. 이것이 지나치면 강박이 되겠지만, 자연스럽게 연습이 된다면 나중엔 의식하지 않아도 영상 기억력의 초점이 또렷해짐을 느낄 수 있다. 


한 컴퓨터 공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뇌의 정보 처리 과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효과적인 정보 손실 프로세스'라고. 정보의 대홍수 속에서 잘 잊어버리는 건 정말 중요한 능력이다. 그런데 정작 대화 상대를 앞에 두고, 쉴 새 없이 끼어드는 중요하지도 않은 메시지와 전화에 응답하랴, 잡을 필요도 없었던 다음 약속 때문에 끊임없이 시간을 확인하랴, 어디를 가든 주의를 끄는 모니터에서 드라마나 스포츠 경기를 틈틈이 체크하랴. 결국 가장 중요한 걸 잃는다. 눈앞의 사람을.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현재를 희생하며 미래를 위해 바쁘게 사는 게 잘 사는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그림 습관이 현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줬다. 지금은 사람을 만나면 웬만해선 핸드폰을 손이 안 닿는 곳에 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본다. 즉시 응답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일은 적어도 나에겐 없다. 심지어 누군가의 부음이라 할지라도 1시간 전에 전해 듣는다고 막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세상에 그렇게까지 24시간 대기 중이어야 할 직업은 많지 않은데도 우리는 출장도 아니고, 여행을 가면서까지 로밍 서비스를 받아 간다. 그게 이상한 행동인지 의식조차 못하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얽매인 존재로 만들어 간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그래서, 손으로 그리는 그림 이전에 눈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보는 것 뿐이다.

본다는 것은 거리를 두고 소유하는 것. - 메를로 퐁티


(그림여행을 권함,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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