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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빛의 제국] 김영하, 문학동네


AM 07:00부터 시작해 AM 07:00에 끝나는 한 권의 소설

주인공들이 각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뭐라고 하더라

음 전지적 작가 시점? 3인칭 작가 시점?

주인공은 기영인 듯하지만 기영 주변의 인물들, 딸 현미와 아내 마리의 이야기도 심도있게 다뤄진다.

그리고 사실은 그들 간의 이야기에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역시나 김영하 작가의 글은 흡입력이 있어서 금방 또 다 읽었다.




빛의 제국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2-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빛의 제국]은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균형있게 포착하여 우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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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쳐 내려가던 기영은 계단을 다시 거슬러올라 오른쪽 호주머니에 든 오백원짜리 동전을 꺼내 구걸통에 던져넣었다. 바닥과 맞닿은 고개를 더 숙일 수는 없었던지 걸인은 대신 등을 구부려 치켜올렸다. 94


어쩌면 기영은 시네마테크를 기웃거리는 영화광들이 드러내는 권태에 주눅들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그런 건 너무 지겹지 않냐?"라고 그들이 심드렁하게 내뱉는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겐 미지의 것이거나 적어도 참신한 것이었다. 도대체 '그런 것'의 어떤 면이 진부한 것인지 알기 위해 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해야 했다. 진부함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옮겨다 심은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었다. 114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마른 솜을 식도로 억지로 밀어넣는 것만 같았다. 155


스타킹을 신기는 했지만 맨발이나 마찬가지였고 얼어붙은 보도블록의 차디찬 느낌이 그대로 심장까지 전해져왔다. 압구정동의 세련된 주민들은 맨발로 걸어가는 그녀에게 아무도 참견하지 않았다. 그런 냉정함이, 호기심을 감출 줄 아는 그 도회적 태도가 그녀에게는 정말 놀라웠다. 광주의 충장로에서 어떤 여자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맨발로 걸어갔다면 벌써 누군가가 등을 빌려주거나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압구정동에선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190


5교시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주파수가 어긋난 라디오처럼 교실이 온갖 잡음으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튕겨일어나 이리저리 움직이며 떠들어댔다. 물에 열을 가해 백 도에 가까워졌을 때의 분자들이 아마 저런 모습일거야. 현미는 생각했다. 201


"나는 매미하고 슬프다이. 나는 매미하고 슬프다이."

철수는 할머니가 유난히 매미의 울음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사실은 가여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문법은 틀려도, 아니 어쩌면 틀렸기 때문에 더더욱 할머니의 슬픔이 손실 없이 철수의 심장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227


넌 인생에 대해 자신만만하구나. 지금 눈앞의 나이든 여자 하나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도 한때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단다. 근데 이제야 알게 된 건 단 걸 먹고픈 충동 하나도 제대로 통제가 안 된다는 거야. 233


"그런데 왜 우리나라 소설에는 그런 부분이 빠져 있는지 모르겠어. 집을 사수하는 남자의 이야기 말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과 가정을 강탈당하면서 사는데. 이를테면 요즘 같은 신용불량의 시대에 수많은 남자들이 얼마 안되는 빚 때문에 평생을 걸고 장만한 집이 남에게 넘어가는 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잖아. 왜 아무도 무기를 들지 않지? 왜 농성을 하거나 분신자살을 하지 않는 거지? 우리 대학 시절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고문당했다고 궐기를 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이 시대의 중핵이 되어 살고 있는데, 왜 자기 집을 사채업자나 은행에 빼앗기면서도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까?" 271


"오래 갖고 있었더니 꼭 내 거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기분 알아?"

"그래, 그런 기분 알아. 하지만 그건 내 거야. 잠깐 너한테 맡겨둔 거잖아."

"그렇지. 그렇지만 그렇게 오래 갖고 있었더니 적어도 오 년동안 내가 뭘 갖고 있었는지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승우라는 작가 소설집 중에 이런 제목이 있어.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307


"정말 경험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창작에 도움이 되는 걸까?"

"적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장님도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아주 놀라운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눈이 보인다면 더 잘 그릴 수 있을 거야."

"오히려 보이는 것에 압도당해서 원래 갖고 있던 감각마저 흔들려버리지 않을까?" 313


"뭘 해서가 아니라 뭘 하지 않아서 죄가 되는, 정말 독특한 범죄라고 생각했었어. 생각하면서, 저런 일을 당한 사람들, 참 황당하겠다 싶었는데."

"미안하다."

"아까 무지가 인류에게 결코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는 말 취소할래. 앎 그 자체만으로도 죄가 되는 법이 엄존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까불었어." 319


"바둑을 두다보면 말이야, 내가 바둑 했었잖아, 빈 데가 더 중요해. 그게 집이라는 건데, 뭐가 차 있는 데가 아니란 말야. 근데 집이 크면, 그니까 많이 비어 있으면 이기는 거야, 바둑이라는 게.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거, 그런 게 더 중요한 거 아닐까. 아, 내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330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온몸이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화가 난 것과 비슷했다. 열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됐고, 조금 전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이런 느낌을 잘 표현한 글을 읽고 싶었고, 그런 음악을 듣고 싶었다." 338


"잘 들어봐.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돼. 나한테도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 그 선택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게 인간이 시간여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야. 과거로 돌아가 아주 사소한 거 하나만 바꿔도 이 세상은,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되는 거야." 382


"나는 배신감이란 게 말이야, 그냐 속아서, 당해서, 그래서 억울한 거라고 생각했었어. 이제 보니 그게 아니야. 배신감은 말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허물어. 그런 거였어.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내가 과연 잘 살아온 건지,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지금까지 이렇게 어리석었던 년이 다른 거는 뭐는 잘했겠냐구? 그리고 앞으로도 과연 뭘 잘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남한테 이용이나 당하고 살겠지. 그렇겠지. 안 그래?" 385


오늘 하루, 또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며 욕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