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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창비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 술로 인한 희로애락의 도돌이표는 글을 쓸 때의 그것과 닮았다. '술'과 '설'은 모음의 배열만 바꿔놓은 꼴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거짓 '설'을 연기하던 나는 어느덧 크게도 아니고 자그마하게 '설'을 푸는 小설가가 되었다.


(중략)


아무리 마셔도 아무리 써도 끝장이 나지 않는 불안의 쳇바퀴 속에서 나는 자꾸 조갈이 난다. 오늘은 또 누구와 술을 마시고 누구에게 설을 풀 것인가. 그 누구는 점점 줄어들고 나는 점점 초조해진다. 몇번 입술을 깨물고 다짐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나란 인간은 (A와 마찬가지로) 결코 이 판에서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작가의 말 중에서


























총 일곱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밤」 「삼인행」 「이모」 「카메라」 「역광」 「실내화 한결레」 「층」

책이 내 손에 쥐어지자마자 목차를 펼쳐 「안녕 주정뱅이」부터 찾아보았는데, 그런 제목의 소설은 없었다.

보통의 단편집은, 단편집의 제목 그대로의 소설이 꼭 들어있곤 하는데.


그래도 다 읽고나서 흥미로웠던 것은, 작가 자체가 애주가이며, 이 소설 속 주인공 모두가 술을 마시며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 모두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제목을 지었다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아, 그런데 이 소설 속에 "주정뱅이"라는 표현이 딱 한 번 나오는데, 「역광」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가 물었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역광」 /173p)



만약 「안녕 주정뱅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소설이 하나 있다면, 어쩌면 「역광」이었을 수도 있겠다.




지하철에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고, 나는 술을 마시러 가던 길이었다. 좋은 안주(=회)에 청하를 곁들여 마시면서, 둘이서 세 병을 비웠는데 우와 오랜만에 느끼는 알딸딸함에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집으로 걸어오는 길,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이 소설에서 발견한 또다른 재밌는 포인트는, 권여선 작가는 "아주 사소한 전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듯한데, 예를 들면, 


그 일은 어쩌면 10년 전에 지자체의 책임자가 그 길을 다시 포장하면서 아스팔트 대신 돌길을 깔기로 결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2년 전에 문정이 고나주에게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카메라」/ 110p)


오래전에 그들은 같은 여고에 입학했고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그들이란 혜련과 선미, 경안, 이렇게 셋이다. 혜련의 원시(遠視) 때문에 그들은 14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실내화 한켤레」/ 176p)


아마 당시에 과외가 허용되었다면 혜련이 경안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랬다면 산도적이 그들의 학교에 부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른두살에 다시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은 과외금지 조치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실내화 한켤레」/ 193p)



이런 것들이다. 물론 모든 일들이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발생한다거나, 모든 인연이 이런 작은 계기가 있어서 맺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분명 티끌같은 요소가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삶이란 정말 예측불가능한 것이구나, 싶다.ㅎㅎ








「봄밤」


영경은 계속 읽어나갔다.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노보드보로프라는 혁명가는, 똘스또이에 따르면, 이지력은 남보다 뛰어나지만 자만심 또한 굉장하여 결국 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 까닭인즉, 이지력이 분자라면 자만심은 분모여서 분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가 그보다 측량할 수 없이 더 크면 분자를 초과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략)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25p 




「삼인행


자연이든 관계든 오래 지속되어온 것이 파괴되는 데는 번갯불의 찰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후략) /62p




「역광」


"나는 그에게 참기 힘든 질투를 느꼈지요. 그가 조이스와 베께뜨를 그 정도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그들을 그토록 정확히 이해하고 번역함으로써, 그리하여 그들을 한국어로 정확히 반복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구구절절이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미증유의 선망을 품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그렇게 고스란히 그들과 완전히 합동인 정신의 언어로 실현될 수 있을까요? 불행히도 나는 아직 그런 사랑의 대상을 발견한 적이 없답니다." /149p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 /169p


"누군가와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아요. (후략)" /171p




「층


입안에서 줄곧 맴돌던 말이 튀어나왔다. 초추의 양광 같은 목소리죠,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가 못 알아들은 기색이자, 말하자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목소리라는 뜻, 하고 설명했다. /21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