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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빨간책방

이동진의 빨간책방 12회 _ 에디터 통신 / 소리나는 책 - 두근두근 내 인생


1시간 45분 50초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에디터 통신

다름이 아니고 

그냥 이 분 목소리 너무 예쁘다


1시간 51분 50초 소리 나는 책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의 첫 장편 소설)

나의 리뷰 http://youneverknow.tistory.com/150


소리 나는 책 코너를 집중해서 듣기가 참 어려웠는데, 내가 읽은 책을 읽어주니 그 감동이 무언지 알겠다. 출근 길 지하철에서 눈물이 흘렀다. 차창에 비친, 울음을 참는 내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리뷰에 옮겨 적은 페이지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더욱 몰입해 들었다. 예쁜 단어, 라는 말이 꽤 자주 등장하는데, 김애란 소설가, 단어를 참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알겠다. 많은 작가가 그러겠지만 -


첫 페이지

어릴 땐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면서 주위를 어지럽혔다. 각각의 이름은 맑고 가벼워서 사물에 달싹 붙지 않았다. 나는 어제도 듣고 그제도 배운 것을 처음인냥 물어댔다. 손가을 들어서 무언가를 가리키면 식구들의 입에서 낯선 활자를 가진 단어들이 툭툭 떨어졌다. 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듯 내가 물어 무언가 움직이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건 뭐야 라는 말이 좋았다. 그들이 일러주는 사물의 이름보다 좋았다. 비는 비, 낮은 낮, 여름은 여름, 살면서 많은 말을 배웠다. 자주 쓰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상에 뿌리내린 것이 있고 식물의 종자처럼 가볍게 퍼져가는 말이 있었다. 여름을 여름이라 할 때,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믿어 자꾸 물었다. 땅이라니, 나무라니, 게다가 당신이라니. 입속 바람을 따라 겹치고 흔들리는 이것 저것 그것. 내가 그것, 하고 발음하면 그것, 하고 퍼지는 동심원의 너비. 가끔은 내 세계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라 칭할때 네 개의 방위가 아닌 천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서 십자가를 쫓아가보는 것. 당신이라 부를 때 눈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평함을 헤아리는 것. 그러나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바람은 자꾸 불고,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난 젊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들 역시 마찬가지일테니까. 


1시간 58분 10초 (50페이지) 가슴이 시리도록 젊은 아버지를 바라 보며 웃었다

"아빠 지금 슬퍼요?"

"응"

"나 때문에 그래요?"

"응"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버지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답했다.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는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것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서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니가 나의 슬픔이라서 기쁘다 나는.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그리고 마음이 아플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아빠 전 이미 아이인걸요"

"그래 그렇지"



2시간 1분 30초 (97페이지)

고작 열일곱살 밖에 안 먹었지만 내가 이만큼 살면서 깨달은게 하나 있다면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철저하게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거였다. 그것은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누구와 나눠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라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려면 살아 있어야 하니까. 나는 내게 몸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혓바늘이 돋은 순간만큼 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때도 없는 것처럼. 각 기관들을 아주 세부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의식하면서 살아야했다. 남들이 뼈를 뼈라 물을 때 나는 그걸 그냥 뼈라 물을 수 없었다. 남들이 폐를 폐라 말할 때 나는 그걸 단순히 폐라 여길 수 없었다. 의대생들이 밤을 새며 달달 외우는 수백개의 이름처럼 내가 가진 단어에는 그것이 몸에 붙기까지 견뎌온 시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내게 피부가 있다는 걸, 심장과 간, 근육이 있다는 걸 매번 상기해야 하는 건 고단한 일이었다. 육체와 정신이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해도, 가끔은 반드시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연인들처럼, 혹은 사이좋은 부부들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건강에 무지한 건강, 청춘에 무지한 청춘이 부러웠다.



2시간 4분

음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게. 우리집엔 황토살독이 하나 있어. 이른 아침 어머니는 밥을 하려고 거기다 쌀을 푸곤 하는데 그때 나는 어렴풋이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독뚜껑 닫히는 소리가 좋았어. 그 소리를 들으면 살고 싶어졌지. 상투적인 멜로영화 예고편 그런거 봐도 살고 싶어 지고. 아 재미있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재치있는 애드립 던질 때. 그 때 나는 사고 싶어져. 동네 구멍가게에 무뚝뚝한 주인 아저씨. 그 아저씨가 드라마를 보다 우는 것을 보고 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어.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여러가지 색깔이 뒤섞인 저녁 구름, 그걸 보면 살고 싶어져. 처음 보는 예쁜 단어, 그걸 봐도 나는 살고 싶어 지지. 다음은 막 떠오르는 대로 나열해 볼게. 학교 운동장에 남은 축구화 자국, 밑줄이 많이 그어진 더러운 교과서, 경기에서 진 뒤에 우는 축구 선수들, 버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애들, 어머니의 빗에 낀 머리카락, 내 머리맡에서 아버지가 발톱 깎는 소리, 한밤중에 윗집 사람이 물내리는 소리, 매년 반복되는 특징 없는 새해 덕담, 오후 두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서, 말도 안되는 성대모사를 하는 중년 남자, 내 상상의 속도를 넘어서며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전자 기기들, 한낮의 물리치료실에서 라디오를 통해 나른하게 들려오는 복음성가, 집에 쌓인 영수증, 와 정말 많다 그치? 아마 밤새워도 모자랄걸. 나머지는 차차 알려줄게. 어쨌든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게 나를 두근대게 해.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니가 보낸 편지. 그럼 또 쓸게. 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