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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시

김미정 시집, 하드와 아이스크림, 시와 세계


사전정보 하나 없이 제목이 마음에 들어 골라집었다.

예전엔 각각의 시 모두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시집을 읽어서

시집 읽기가 매우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손이 가지 않았다.

요즘은 그냥 읽는다. 참 별의 별 이야기가 시의 소재다, 하면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는 대로, 이것은 작가의 세계이려니.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면 밑줄을 그으면 되고

운 좋게 전문이 마음에 들면 이렇게 옮겨오면 된다.

그런데 마음에 든다고 또 이해가 된 것은 아니다ㅋㅋ

그건 엄연히 다른 문제

사실 김미정의 시 중에서 이해된 거 거의 없다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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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독서일기 (전문)


 그는 소설 속에 사는 인물이다 엄밀히 말하면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책장이 펄럭인다 그는 행간을 뛰어다니며 다양한 시각을 요구한다 그는 소설의 기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그림자에 숨기다.」라는 문장 뒤로 사라진다 나는 중심을 잃고 문장의 입구와 출구를 뒤진다 간혹 그는 활자 뒤에서 가늘게 떨리는 실루엣으로 존재를 알린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읽을 수 없다 방음이 잘 되어 있는 그의 세계가 불안하다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춘다 나의 시선이 활자 속에 꽂힌다 그의 손이 책장을 찢고 나를 힘껏 끌어당긴다 책장이 여러 장 넘어가고 소설의 1부는 끝났다


 두 얼굴의 홀로그램이 겹쳤다 흩어진다 



하이힐은 높아 밧줄을 내려 (전문)


 정원에는 빌딩이 만발했지

 바닥엔 붉은 신호등이 꽃으로 피어나고


 한 조각의 코와 한 조각의 눈이 반짝이는 거리, 난 하이힐을 타고 다녀 긴 속눈썹 같은 밧줄을 잡고 이 빌딩 저 빌딩으로 날아다니지 구멍 숭숭 구름도넛을 뱉으며 분열하는 창문들처럼 난 곧 튕겨 나갈거야 정원을 떠날거야 햇살의 속도는 너무 깊어 만질 수 없고 굵은 밧줄은 내려오지 않지 누군가 소리 없이 뛰어내리고 누군가는 하이힐이 빚어내는 소리에 탭댄스를 추지 빌딩 사이 발바닥의 통점들이 자랄 때 너와 나 맞잡은 손이 블록처럼 깨어나가지


 조각난 얼굴을 밟고 서성이는 태양아래

 꽃들만 웅성거리고 하이힐은 점점 하이 하이!



팝콘 (일부)


휴게소 화장실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은

겨우내 뾰족했던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둥글게 말아 올리고 있었어



내가 나를 뒤돌아보는 나선형 계단 (일부)


난 먼지가 되고 싶어 널 따라다니게



미열 (일부)


날 건드리면 안돼요

뜨거워지는 입술

움찔거리는 生이란 말이에요



포옹나무 (일부)


보는 것은 만지는 것과 같아

당신과 나 사이 무엇으로 채울까

솜사탕을 넣을까

탱탱한 풍선을 끼울까

아니, 아름드리

한 그루 나무를 심어야지



스물 + 하나 (일부)


유턴 표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도로는 몸에 맞지 않는 속도를 강요할 뿐


대화기술법이 턱없이 부족해



지하 숲을 가다 (일부)


「젖는다는 것

아래로 흐른다는 것

옆으로 번진다는 것

더 깊은 안으로 스며든다는 것」



입을 벌려라 (전문)


'벌려라'를 벌려라

'입' 사이즈를 늘리고


탄력 있는 입을 벌려

먹으라면 먹겠어요

내 어머니 젖 빨던 것처럼

부드럽게 빨겠어요

닥치는 대로 삼키죠

당신이 넣어주는 것이라면

핏물 흐르는 심장 두 근

주렁주렁한 당신의 질긴 신경줄까지

씹으라면 씹을게요

츄파춥스 눈동자 사탕

핥으라면 핥을게요


최대한 '입'을 늘리고

벌어진 대로 벌어진

'벌려라'를 더 벌리고요


당신의 몸통까지 들어왔어요

그런데 왜 나는 살이 찌지 않죠

손목도 다리 모두 꾸역꾸역 삼켰다구요

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여전히 이렇게 배가 고프죠

나는 매일 야위어가요

허기의 동력은 꺼지지 않네요

당신이 내 안에 우글우글한데


▶야한 것 같다가 컬트적인 느낌으로 뭔가 엽기적이다가

끝으로 갈수록 슬프고 안타까우며 공감이 가기까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