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생활/시

이장욱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와닿아서 좋은 시가 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도 좋은 시가 있다.


이장욱 시집에서 좋은 시를 모아봤더니

나는 동어 반복을 좋아하거나 의미상 대립되는 모순적인 문장을 좋아하거나


내가 모순적인 사람인가



이장욱의 시집에서 와닿아서 좋은 시는 없고

와닿을 것 같은, 혹은 와닿고 싶은 시가 가득이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국내도서
저자 : 이장욱(Lee, Jang-wook)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16.06.24
상세보기




밤에는 역설


당신을 잊자마자 당신을 이해했어.

닫혀 있기 때문에 들어가고 싶은 문 앞에서.

뜨거워져서 점점 더 뜨거워져서

드디어 얼어붙을 것 같았는데. 이봐,

노력하면 조금씩 불가능해진다.

바쁘고 외로운 식탁에서 우리는

만났으므로 헤어진 연인들처럼.

당신을 알지 못해서 당신에 대해

그토록 많은 말을 했구나.

어려운 책을 읽기 때문에 점점

단순한 식물이 되어서.

해맑아서

잔인한 아이처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새벽마다 또 눈을 뜨네.

내가 조용한 가구를 닮아갈 때

그건 방 안이 아니라 모든 곳,

거기서

당신이 나타났다.

밤이라서 너무 환한 거리에서.

바로 그 눈 코 입으로.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가을이라서 그럴까? 나는

의자를 잊은 채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잠을 완전히 잊은 뒤에

잠에 도착한 사람 같았다.

거기는 아이가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들이

낙엽처럼 쌓여 있는 곳


우산도 잃어버리고 공책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잃어버린 물건들에서 점점

멀어지는 순간을 살아갔다.

숲 속은 잃어버린 나무 같은 게 없는 곳인데

푸른 하늘과 검은 우주가

같은 곳인데


조금씩 다른 빗방울들이 떨어져서

나는 새로 산 우산을 펴 들었다.

그것이 잃어버린 우산과 같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모두 달랐다.

이 비 그치고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을 내가 바라보자

거기 어딘가의 별들 가운데

깊은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조용한 의자를 닮은

그런 밤하늘이라고 중얼거렸다.





월인천강


지도에는 뒤돌아볼 곳이 없어. 거대한 시선으로 가득해서.

쏟아지는 달빛처럼

밤처럼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거기

도착해 있었지.

밤의 수면에 떠오르는 부유물들

부풀어 오른 손가락들

아직 피사체가 지워지지 않은 눈동자


우리는 강변도로를 달렸다.

별들이 가리키는 곳이 없네.

구름이 어디를 바라보지 않았어.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달빛

수천 개의 손가락 아래


표지판이 맹세 중이다. 저쪽으로 가면 저것이 있고 이쪽으로 가면 이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누구에게서 누구까지 마침내

존재하려고 했다.


제한속도를 넘어서

천 개의 강을 지나서





일치


너의 너무 멀리에 있다고 생각하여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지.


아무것도 겹쳐지지는 않았네.

잠결의 비명이라든가

사망시각 같은 것이.


길을 걸어가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뒤돌아보았어.

돌아보면서 왜?

뭐?

라고 다정하게 물었지.


나는 너의 가까운 곳에서 더 가까운 곳으로

응?

그래?

라고 묻는 너에게

처음 보는 너에게


세상에는 먼 데가 참 많구나.

옆모습만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등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걸어가다가 팔꿈치에 닿는


어제의 잠꼬대는 기억나지 않네.

사망시각 같은 것은 정해지지 않았지.

밤의 도로를 앰뷸런스가 달려갔다.

무언가에 조금 더 가까워지려고

일치하려고





밤의 독


나는 깊은 밤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내가 무엇을 읽은 것 같아서.


나는 저 빈 의자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밤하늘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어긋나는 눈송이들을, 캄캄한 텔레비전을,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다 읽어버린 것이


의자의 모양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발의 격렬한 방향을 끝까지 읽어갔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텔레비전을 틀자 개그맨들이 와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잠깐 웃었는데,


무엇이 먼저 나를 슬퍼한 것이 틀림없다. 저 과묵한 의자가, 정지한 눈송이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개그맨들이


틀림없다. 나를 다 읽은 뒤에 탁,

덮어버린 것이.


오늘 하루에는 유령처럼 접힌 부분이 있다. 끝까지 읽히지 않은 문장들의 세계에서


나는 여러 번 깨어났다. 한 권의 책도 없는 텅 빈 도서관이 되어서.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의 영혼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읽은 것은 무엇인가?


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